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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사회
탈북문학

'포 플라워' 제 27화

이지명 작가

글 | 신준식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포 플라워 (four flower)
-작가 소개-
 
이지명
 
전 북한작가
청진1사범대학 어문학부 통신대학 1985년 졸업.
작가동맹 현직 작가로 있다가 2003년 탈북 2004년 대한민국 입국
한국소설가협회회원,
 
Intro
북한망명작가 이지명의 장편소설 <포 플라워, four flower>.
2014년 11월 10일부터 뉴포커스에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재에 앞서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이 소설은 김정은의 첫 사랑이었던 주인공 서재은의 복수를 통해 북한정권 내 실세들의 권력암투의 추악함과 독재정치의 비정함을 그려낸 소설입니다. 소설은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과 실존 인물들에 기초해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단 김정일과 김정은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실명에서 조금씩 변형된 이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없는 불합리한 체제 속에서 사상과 노선에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은 도대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그려 보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여주인공 서재은은 북한에서 살아가야 하는 가장 평범한 존재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자신의 첫 남자 김정은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가 복수를 이루어 내는 모든 과정을 저는 이 소설에서 그려가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북한의 현 정권 실세들이야말로 수천만 인민들의 몸과 영혼에 서식하는 기생충과도 같은 무리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불과 수십 킬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저 휴전선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소위 ‘최고 존엄’이라 일컬어지는 존재의 실체와, 그 기이한 실체를 떠받치고 있는 이상한 집단의 진면목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북한으로부터의 망명 작가들만이 알 수 있고, 전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이곳의 독자들이 ‘인간’을, ‘인간의 삶’을. 그리고 ‘인간의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사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피를 찍어 쓰는 심정으로 연재를 시작하는 장편소설 <포 플라워, four flower>에 독자 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0월 20일 부악문원에서 이지명
 
목차
1>상처의 반란
2>참정의 눈
3>대장 집 안방
4>무도의 총소리
5>허탈
6>마지막 진술
7>딸을 찾는 아비
8>충신의 내면
9>음모의 합작
10>서재은의 계략
11>군중반향
12>현송원의 마지막 인사
13>3인방의 힘
14>다섯 번째 핀 사화
15>안개의 유혹
16>아방궁의 총성
17>겉과 속
18>여자의 향기
19>3인방의 정체
20>응당한 피해자와 억울한 피해자
21>하늘에 던져진 발자취
22>두 여자
23>김원흥의 역습
24>시련의 언덕
25>반전의 여인
26>개들의 개싸움
27>사화 여섯 번째로 피다
 
<27> 사화 여섯 번째로 피다.
 
화창한 봄날이다. 창턱에 놓인 붉은 꽃송이가 햇빛에 어룽져 화사한 모습을 드러낸다. 서재은은 눈을 뜨자 물 뿜는 주전자를 들고 창가에 다가가 화분에 기울였다.
잎과 마른 흙이 순식간에 젖어들며 늘어졌던 푸른 잎사귀가 생기를 머금고 흔들거린다. 주전자를 내려놓은 그녀는 붉게 핀 꽃송이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벌써 여섯 번 째 핀 사화다. 이제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필 때마다 범상하게 흘려보낸 날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서재은에게는 응당한 것처럼 여겨지는 듯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웠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
서재은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방에 들어선 사람은 여자였다. 선우향이다. 훤칠한 키, 굴곡 있는 몸매, 분명한 팔등신이다.
“일어났네요. 밤새 평안했어요?”
“그래, 덕분에, 어서 와”
“언니의 밝은 모습을 보니 저도 기뻐요”
“나도 기뻐. 널 볼 때마다 기운이 나”
두 여인은 밝게 웃었다. 하지만 선우향은 측은한 빛을 얼굴에서 거두지 못한다.
“지금 거기서 오는 거니?”
선우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갈 수도 없고, 아마 이젠 정들었나 봐요”
“앉아요.”
두 여자는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자를 중심에 두고 마주앉았다.
“언니도 무척 보고 싶죠?”
“누가?”
“김정은이 말이에요.”
“보고 싶어? 만나 봐야겠지 보기 싫어도, 그러고 보니 그와 헤어진지도 벌써 20년이 되어오는구나.”
“감회가 새롭겠어요.”
“그런 말이 있지 않니? 이별은 새 만남이라는,,,”
“이번엔 영원히 이별해야겠죠?”
“아니 떨어지지 않을 거야, 다른 세상에 가서도 못된 버릇 내가 가르쳐야지.”
“그럼?”
“해본 소리야 앤 참 신중하긴,”
선우향이 활짝 웃는다.
“그런 걸 난 괜히 속 섬뜩했네. 언닌 참 언니”
“왜?”
“여자의 성이란 게 대체 뭐에요, 왜 남자들은 그토록 거기에 집착해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나도 첫 남자가 떠올라서요. 나이가 참 많았죠. 그때 난 여자의 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몰랐던 때죠. 지켜야 할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내 몸뚱이를 안고 세상에 없는 희귀보물을 안은 것처럼 넋을 빼앗기는 그 사람을 보며 대체 왜 이럴까 하고 생각했어요. 한데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알 듯도 해요.”
“그가 왜 죽었는지는 알고 있니?”
“알고 싶지 않아요. 미련 없으니까, 날 살려 주긴 했지만 내 성을 빼앗은 사람이기도 해요. 엎음 갚음이죠. 세상살이 참 허망해요”
“어쩌다가 그 사람을 만났지?”
“사연은 길어요. 요약하면 이래요. 난 한자리 하는 아버지 덕에 파리의 음악학원에 유학을 갔어요. 그때만 해도 세상이 마치 나를 위해 있는 것만 같았죠. 한데 연주자가 되어 조국에 돌아오니 아버진 숙청당할 위기에 놓였고 결국 난 집에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최용회한테 갔죠. 아버지의 부탁이었어요. 파리에 있을 때 친구였던 장금성이 처형당한 아버지 일로 자살하는 걸 봤기 때문에 난 내 앞길에 드리운 검은 구름장을 보았어요. 이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난 최용회에게 모든 걸 의탁했어요. 최용회는 가진 권력으로 내 신분을 위조해 악단에 넣었고 결국은 값싼 성노리개로 만들어 버렸어요.”
“치사한, 하기야,,,”
“완전 더러운 놈이죠, 날 또 김정은에게까지 넘겨줬잖아요. 하긴 그렇게 김정은의 성노리개가 된 덕에 이렇게 아파트도 갖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최용회에게서 독립해 살고 있긴 해요. 세상은 굶어도 난 굶고 사는 사람들에겐 부러운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죠. 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선우향의 눈엔 한가득 눈물이 괴여 올랐다. 서재은도 선우 향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비분의 마음을 달랬다.
“마음 굳게 먹어야 해. 세상이 계속 이렇게만 돌아가겠니? 밝은 세상이 반드시 올 거야”
“언니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예요. 한 놈이라도 물고 같이 죽죠 뭐 살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뭐예요.”
“결국 내가 널 죽음에로 몰아넣는 셈이구나.”
“아니죠. 언니를 만나 지내온 날이 내겐 잃어버린 삶을 모두 되찾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최용회 같은 쓰레기가 죽어나가는 꼴을 보았을 때 난 마치 아버지의 복수를 이룬 것 같은 쾌감에 젖었죠. 이제 김정은만 죽는다면 무얼 더 바랄 것이 있겠어요. 언니를 만나기 전에는 정말 영혼 없는 개 같은 삶이었어요.”
“그래 너 같이 재능 있는 애가 존엄 없는 삶에 어찌 만족할 수 있겠니, 이제 그만하자, 오늘 밤, 어느 때쯤 가야 하니?”
“자정이에요. 내가 없으면 잠이 오지 않는지 이젠 잘 때만 날 찾거든요. 하하 참 내가 잠을 재워 주는 살아있는 인형인가 봐요 미친”
서재은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근엄한 빛이 그 얼굴에 어렸다.
이제는 모든 걸 끝낼 때가 온 것이다. 그녀는 큰일을 앞두고도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선우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나 온 모든 일이 아프게 맺혀 왔다. 오늘 밤 그녀는 선우향 대신 김정은의 침소에 들어간다.
김원흥의 전화에 의해 중이동아지트에서 풀려났을 때 그녀는 조연진을 찾아갔었다.
마지막 결행인 김정은 테러를 마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춰 놓고 있었다.
선우향 대신 김정은을 만나러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을 때 그녀는 뜻밖의 일에 부딪쳤다. 창문을 통해 날아든 총탄이 그녀의 오른 쪽 가슴을 관통했던 것이다. 후에 밝혀졌지만 총을 쏜 자는 이설희가 보낸 자객이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후 서재은은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지금도 그 후유증을 완전히 털어버린 건 아니었다. 조연진의 주선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도 사실상 선우향이 아니었더라면 다시 밝은 빛을 보지 못했을 지도 몰랐다.
선우향을 알게 된 것은 자결한 장금성의 유품 중 파리에서 쓴 일기장을 본 것이 계기였다.
장금성은 처형된 장승택의 딸이었다.
3인방의 한 성원인 김경욱이 장금성의 일기장을 대성산아지트의 방에 간수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서재은의 눈에 띠였다.
선우향의 말처럼 교묘하게 신분세탁이 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가진 바이올린연주 실력은 결국 서재은의 남다른 감각에 의해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선우향 역시 이 정권에 한이 맺혀 있는 여자였다. 두 여자의 목표는 꼭 같다고 해도 거짓이 아니다. 선우향도 몇 번에 걸쳐 김정은을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았다.
잠자리까지 같이 하는 조건에서 기회는 있을지 몰라도 가진 실력으로는 성공확률이 적었다.
밤 아홉시가 되자 선우향이 근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김정은 방에까지 들어가자면 검문이 보통 까다롭지 않은데 일없을까요?”
“걱정 마 이미 연락해 놨어, 별장 정도는 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장악할 수 있을 거야, 지금껏 연락 없는 것으로 봐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는 의미야. 평양역에 나가면 새벽에 있는 신의주 행 열차를 타. 안내하는 사람이 널 찾을 거야.”
“언니는?”
“난 내일 들어갈게. 같이 움직일 순 없잖아.”
“꼭 살아서 와야 해요. 언니 없으면 이제 난 안 돼요. 살아도 같이 살아요. 어디에 가던 언니만 있으면 난 파리에서처럼 즐겁게 살 것 같아요.”
“알겠어. 널 두고 죽지 않을게”
 
열한시경 사화가 핀 화분을 안고 서재은은 아파트를 나와 구석에 세워 놓은 승용차에 올랐다. 선우향이 김정은에게서 선물 받은 벤츠다. 지금의 그녀모습은 서재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사전요해로 여러 번 다녀 본 길이어서 원심관에 도착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정문을 통과해 침실이 있는 기본 건물 안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녀를 막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복도에서 군관 한 사람이 그녀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주었을 뿐, 서재은은 무난하게 침실로 들어갔다.
김정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탁자위에 사화가 핀 화분을 놓으면서 재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히 긴장됐었다.
진정 3인방의 힘은 혀를 내두를 만 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수령이란 간판을 목에 걸었을 뿐 결국 타인의 손끝에서 쪽도 못 쓰는 허수아비 같은 김정은이 어쩌면 불쌍하기도 했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도 아니다. 이제 삼십분 후면 20여년에 걸쳐 준비하고 벼려온 복수의 종막을 내리게 된다.
그와 함께 그의 어깨를 지지눌렀던 무거운 짐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겉옷을 벗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입은 서재은은 소파에 앉아 까딱 움직이지 않고 출입문만 직시했다.
방안은 숨 막힌 고요 속에 잠겨 질식할 것만 같았다.
뗑뗑 어디선가 울리는 쾌종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희붐한 불빛이 어룽지는 방은 정말이지 숨 막히는 무덤 속 같다.
바깥문이 열렸다. 재은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안의 문이 열리고 커텐이 들린다.
“오늘은 어쩐 일이야? 항상 마당에서 기다리더니?”
김정은이 들어선다. 들어섬과 함께 물씬 술 냄새가 풍겼다. 재은은 얼른 다가가 그가 벗는 코드를 받아 쥐고 안쪽 문 옆에 있는 옷 걸개에 걸었다.
“이것도 새롭네, 늘 시켜야 걸더니, 흐흐”
기분 좋은 듯 털썩 김정은이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러면서 옷을 걸고 돌아서는 여자의 손을 잡아 가볍게 끌어당긴다. 서재은은 김정은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겨버렸다.
여자를 안고 조금 기대고 있던 김정은이 벌렁 뒤로 넘어진다. 눈을 감고 손을 이마에 얹은 채 까부라진 혀 끝 소리로 어서 날 좀 재워달라고 중얼거린다.
“사향가연주 들려드릴까요?”
“그래? 한 번 해 봐. 참 오늘은 웬일이야?”
서재은은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기척 없이 누워 있는 김정은을 바라보며 서서히 활을 긋기 시작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사향가가 아니었다. 은은한 전주에 맞춰 맑은 여자의 애절한 음성이 방안을 메운다.
 
엄마가 그리워 우는 아이 당신은 저 아이 아픈 마음 아시나요.
은하수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자장가 소리 한 번 내어 봐요
 
한 소절이 흘렀을 때 벌써 김정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엉거주춤 반신을 일으키고 노래를 부르는 여인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번쩍 빛을 뿜는 김정은의 눈은 이미 술에 절어 쌀뜨물 같았던 희부연 눈이 아니었다.
그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재은은 노래를 계속했다.
 
아- 못 견딜 그리움에 흐르고 흐르는 눈물이여
자장, 자장, 자장. 엄마의 자장가소리여
 
넓은 방안 끝에서 노래하는 여인의 모습이 그 순간 확대되어 눈앞으로 다가온다.
이 노래를 어디서 들었던지, 김정은은 한 발 두 발 서재은에게로 걸어왔다.
“다시 한 번 해 봐”
직시하는 사내의 눈길을 외면하며 서재은은 목에 댔던 바이올린을 내렸다.
그 다음 마디마디 힘을 주어 또렷이 말했다.
“정은아, 넌 이 노래를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너의 생애에 마지막으로 들려 준 곡일 뿐이고,”
“뭐라?”
“넌 이 나라의 수많은 아이들에게서 엄마를 빼앗아 갔어, 넌 네가 이고 사는 이 나라의 하늘을 그저 푸르고 광대하다고만 생각했겠지.”
“넌 누구냐?”
놀란 김정은이 벌렁벌렁 뒷걸음쳤다. 서재은의 담담한 목소리는 그냥 화살처럼 날아온다.
“저 하늘엔 반세기 이상 한 맺힌 동족의 저주가 배어 있어. 밤만 되면 난 나를 낳고 피눈물을 뿌리며 하늘나라로 간 엄마의 눈물 젖은 자장가소리를 늘 듣곤 해, 넌 백번 죽었다 깨어도 이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겠지만 말이야.”
바이올린을 내려놓은 서재은이 머리에 썼던 실리콘 가면을 벗었다.
“으응?”
김정은은 흠칫했다. 목석처럼 굳어져 오도 가도 못한 채 놀람과 경악이 엇갈리는 눈으로 앞에 선 여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야 재은이야,”
“누나?”
“응 누나야. 저길 봐”
서재은은 침대머리탁자에 놓인 화분을 가리켰다. 김정은이 꽃을 들여다본다. 크고 아름다운 두 송이 꽃이 보란 듯 활짝 피었다.
“이 꽃이 어떻게 여길?”
“네가 버렸잖아, 아니면 설희가 버렸겠지. 너는 버렸어도 난 이 꽃을 버릴 수가 없었어. 내가 네게 순정을 담아 선물했던 꽃이었으니까 꽃이 이름도 네가 지었잖아 사년에 한 번씩 핀다하여 사화라고 지었었지, 벌써 잊어버렸어?”
“아니 잊지 않았어. 내가 그걸 잊을 수는 없지 근데 정말 누나가 맞아?”
서재은이 김정은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똑바로 봐 그럼 내가 누구겠어.”
벌써 20년이 흘렀다. 앳된 열일곱 살 소녀의 표상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사랑과 정으로 가슴에 박혔던 눈빛만은 여전했다. 정은의 두 손이 재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저도 모르게 하는 행위 같았다. 재은은 제지하지 않았다. 쓰다듬는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그 손을 잡고 서재은은 김정은을 소파로 이끌었다.
마주앉았다. 이윽히 들여다보는 김정은의 얼굴엔 차츰 놀람이 사라지고 반가움이 찾아드는 듯 백지장처럼 하얗던 얼굴이 연한 홍조로 물든다.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야 찾아왔어?”
마치 기다렸던 연인을 뜻밖에 만나 던지는 평범한 말 같았다.
“그렇게 반갑니?”
“그래, 보고 싶었어. 많이 찾았고, 넌 날 죽이겠다고 쪽지까지 남겼지만 그런 것 때문에 널 잊지는 못하겠더라, 세월과 함께 점점 그리워졌어. 이건 정말이야”
“정말이겠지 거짓이 없다는 걸 나도 알아, 넌 이미 세월 속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힘이라 해야 할까, 넌 네게 차례진 힘의 노예로 전락했어. 힘의 용도 속에 용해되어 버린 사람이 힘을 가지면 어떤 것도 다 자기의 부속물로 보인다고 하더라,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싶으면 놀고 넌 네게 허리를 굽히는 모든 사람들의 존엄도 너와 똑 같은 것임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없을 거야. 어쩌다 이렇게 됐니. 내가 알고 늘 그리웠던 소년은 대체 어디로 갔니? 응?”
“내가 그 소년이야, 다른 사람이 아니야 왜 몰라보는 거야?”
“그 소년은 이미 죽었어. 지금의 너는 권력에 중독되어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조차 잊어버린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해 알아들었니?”
“?”
“짐승도 그러진 않아 짐승도 동족에게만은 관대하거든 힘이 있어도 동족은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런데 넌 너를 수령으로 만들어준 많은 사람들을 단 하나,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서슴없이 잡아먹었거든 난 너의 아버지에게 아버지를 뺏겼어 엄마도 뺏겼고 나를 낳아준 친아버지도 네 총에 맞아죽었어. 현심당조직부장이 바로 나의 친아버지야”
 “뭐라구? 그게 무슨 소리야?”
“넌 너와 너의 가문을 위해 한생을 바친 내 친아버지를 사람들 면전에서 개처럼 쏴 죽였어, 대체 누가 네게 그런 권한을 주었니? 어디 말 좀 해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말하자면 김정은이가 아닌 최고수장이 쏴 버린 거야, 거두라는 참정을 끝까지 고집하는 그 사람의 우매함이 결국 그를 죽음에로 몰아넣은 거야 오해하지 마”
“뭐라구?”
유순했던 서재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아니 살의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어인일인지 서재은이 이내 침착성을 회복한다.
“방금 최고 수장이라 했니? 넌 네가 최고수장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거니?”
“그럼 누가 수장이야? 내가 아니면? 너도 죽고 싶은 거로구나 난 이 나라의 절대 권력자야. 네 친아버지라는 현심도 그래서 내 총에 죽은 거구 그리 죽여도 내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어. 절대적인 권력자가 아니면 생각도 못할 일이지.”
서재은의 얼굴에 조소가 어린다. 그녀는 너는 너를 잘 알고 죽으라는 식의 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넌 그 자리에 앉기만 하면 최고수장이 되는 것으로 아니? 이제 20대를 갓 벗어난 네가 대체 무얼 알아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이 바로 그 나이야.
사람은 평생을 두고 배워야 한다는 말이 너에겐 해당되지 않는가보지? 신문 방송 라디오 군중강연 같은 걸 총 동원해 영명하고 위대한 수령이라고 칭송하니까 진짜 그런 줄 착각했니? 온 나라가 굶주림에 허덕이는데 그걸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대신 놀이터나 만들고 군부나 쏘다니며 명령하길 즐기고 왜? 수백 명 군인들이 네가 오면 발을 구르고 만세를 부르니까 진짜 위대한 영장인가 했던 거니?
넌 차디찬 전호에 엎뎌 잠복근무 한 번 서 본 일이 없는 세상 풋병아리야, 만세를 부르면서도 그 사람들은 속으로 너를 비웃었을 거다. 넌 너를 두고 수령이라 자부하며 뭔가 도모하려 했어도 지금까지 네 의지대로 된 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마저 아마 몰랐을 거다.
이제 내가 대 줄게, 똑바로 들어, 애초 너의 아버지장례를 맡았던 일곱 명의 간부들은 너의 아버지가 너를 보좌하라고 내세운 사람들이었어. 그런 걸 당조직지도부 이제경의 후임으로 앉은 조연진이 김경욱과 함께 앞으로 자기들에게 닥쳐올지도 모를 정치적 위기를 감안해 그 일곱 명을 모두 숙청해 버렸어.
넌 그때까지 20년 전 네 아버지가 벌였던 심화조 사건을 염두에 두고 새 정권이 들어서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가보다 하고만 생각했겠지.
고모부인 장승택마저 너의 정치적 무지에서 비롯돼 처참한 정치제물이 되고 말았어.
너는 이설희와 장승택의 포옹장면 사진이 어떻게 되어 가장 적절한 순간에 네 면전에 놓였는가를 지금도 모르고 있을 거야,
그러고도 네가 영명한 수령이야? 여자나 밝히고 고급한 물건으로 사치놀음이나 벌이고 아침, 저녁 좋다는 건 다 끌어다 배를 채우며 세월아 네월아 보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치 문맹자. 그래도 네가 최고 권력자야, 넌 버러지야 아니 버러지보다도 못한 쓰레기야.
언제까지 수령의 허울을 쓰고 남의 장단에 춤을 추겠어, 난 오늘 너의 목숨을 거두려고 이렇게 찾아왔을 뿐 구역질나는 네 그리움이나 달래주려고 찾아온 거 아니야 알겠어?”
서재은이 한 발 다가서자 김정은은 한 발 물러섰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그런 경박한 말을 던지는 거야. 이 비상벨을 누르면 네 목숨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여줄까. 수도엔 나를 지키는 군대만 해도 수만 명을 헤아려,
뭘 좀 알고 덤비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왜 죽을까봐 겁이 나니? 그럼 어디 그 비상벨이라는 걸 눌러 봐. 수만이 아니라 수명만 와도 내 너를 수령으로 인정해 줄게. 어서”
“정말이야?”
“그래, 어서 눌러”
그래도 김정은은 벨을 누를 용기가 없는 듯 서재은의 눈치만 본다.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는 여자 앞에서 죽이러 왔다는 말 한마디에 사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다.
서재은은 픽, 웃으며 직접 비상벨을 눌렀다.
요란한 경보음소리가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우당탕 거리는 발자국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서재은이 품은 총에 손을 들어올린다. 하지만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마도 누가 엄하게 제어하는 듯,
벨소리가 멎었다. 건물은 다시 고요 속에 묻혔다.
“수만 명의 군대는 다 어디로 갔어? 왜 안 오지? 이제야 말로 너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쓰레기라는 걸 자인해야겠구나.”
서재은은 바이올린케이스에서 짧은 칼을 뽑아들었다. 밝은 불빛에 예리한 칼날이 번쩍 반사됨과 동시에 김정은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바로 침대머리 탁자위에 활짝 피어난 사화 앞이다.
“그 꽃을 봐”
서재은은 천천히 김정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이 꽃은 더는 피어나선 안 되겠지.”
재은은 화분에 뿌리를 박은 화초를 잘라냈다. 그 꽃가지를 잡아 정은의 손에 쥐어주었다.
“꽃과 함께 우리 같이 가자.”
김정은의 눈엔 오로지 번뜩이는 칼밖에 안 보인 것 같다 손가락 굵기의 꽃가지를 서재은이 단칼에 잘라낼 때 이미 반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살려 줘,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그래 안 죽일게, 그냥 칼을 받아 봐, 아님 총알을 박아줄까? 네 총에 맞은 사람의 마지막 심정을 네가 알려면 그게 최선책이겠다.”
서재은은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절컥, 장탄하자 김정은의 눈이 뒤집힌다.
“어디를 맞던 어디를 찔리던 너 죽지 마 그래야 고통 속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걸 알아야 넌 수령이 되는 거야. 알았니?”
탕, 총성이 울렸다.
탕, 두 번째 총성이 울린다.
탕, 세 번째다.
김정은의 허벅지와 어깨, 오른 쪽 가슴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나온다.
그만한 타격이면 정신을 잃고도 남으련만 용케도 김정은은 머리를 숙이지 않고 버티고 있다. 아마도 살고 싶은 미련과 지금 한창인 이 나이에 죽어서는 안 된다는 아쉬움이 그를 그렇게 버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몸에서 흐른 피가 홍건이 바닥을 적셨다.
칼을 든 서재은이 다시 김정은에게 다가간다. 초점을 잃어가는 정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재은은 짧은 칼날을 김정은의 왼쪽 가슴늑골사이로 깊숙이 박아 넣었다.
이제 비틀면 숨이 끊어진다. 아니 아직 끊어져선 안 된다. 오래 오래 지속되는 고통 속에서 지금껏 저지른 죄에 피의 속죄를 해야만 하는 인간이었다. 무고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맛본 처절한 아픔을 그도 숨이 끊기기 전에 한 번쯤은 맛봐야 했다.
출입문을 열었다. 서재은은 복도에 나섰다. 튀어버린 핏방울이 입은 잠옷, 흰 얼굴, 어디에나 묻어있지 않은 데가 없다. 총을 내댄 군인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한 발 한발 다가온다.
서재은이 손에 든 총구를 피 묻은 왼쪽가슴에 박는다. 군인들은 발을 멈췄다.
“잊지 말아요. 독재가 계속되는 한 이 나라의 앞날은 없습니다. 나를 겨눈 그 총으로 세상을 바꿔 주십시오. 아니면 독재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수백만의 원혼들이 당신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탕, 서재은의 손에서 총성이 울렸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대동강에서 바닥모래를 퍼 올리던 중장비기사는 바가지에 담겨 올라온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그 여자는 죽으면서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던지 바이올린케이스의 손잡이를 꼭 틀어잡고 눈도 감지 못한 채 굳어져 있었다.
당 중앙조직지도부에 늦은 시간에 출근한 조연진은 테이블에 다가가 수화기를 들고 김예정을 찾았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김정출의 안부를 정중히 물었다. (끝)
2014, 8,30
부악문원에서 이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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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1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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