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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사회
탈북문학

'포 플라워' 제 25화

이지명 작가

글 | 신준식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포 플라워 (four flower)
-작가 소개-
 
이지명
 
전 북한작가
청진1사범대학 어문학부 통신대학 1985년 졸업.
작가동맹 현직 작가로 있다가 2003년 탈북 2004년 대한민국 입국
한국소설가협회회원,
 
Intro
북한망명작가 이지명의 장편소설 <포 플라워, four flower>.
2014년 11월 10일부터 뉴포커스에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재에 앞서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이 소설은 김정은의 첫 사랑이었던 주인공 서재은의 복수를 통해 북한정권 내 실세들의 권력암투의 추악함과 독재정치의 비정함을 그려낸 소설입니다. 소설은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과 실존 인물들에 기초해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단 김정일과 김정은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실명에서 조금씩 변형된 이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없는 불합리한 체제 속에서 사상과 노선에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은 도대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그려 보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여주인공 서재은은 북한에서 살아가야 하는 가장 평범한 존재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자신의 첫 남자 김정은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가 복수를 이루어 내는 모든 과정을 저는 이 소설에서 그려가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북한의 현 정권 실세들이야말로 수천만 인민들의 몸과 영혼에 서식하는 기생충과도 같은 무리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불과 수십 킬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저 휴전선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소위 ‘최고 존엄’이라 일컬어지는 존재의 실체와, 그 기이한 실체를 떠받치고 있는 이상한 집단의 진면목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북한으로부터의 망명 작가들만이 알 수 있고, 전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이곳의 독자들이 ‘인간’을, ‘인간의 삶’을. 그리고 ‘인간의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사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피를 찍어 쓰는 심정으로 연재를 시작하는 장편소설 <포 플라워, four flower>에 독자 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0월 20일 부악문원에서 이지명
 
목차
1>상처의 반란
2>참정의 눈
3>대장 집 안방
4>무도의 총소리
5>허탈
6>마지막 진술
7>딸을 찾는 아비
8>충신의 내면
9>음모의 합작
10>서재은의 계략
11>군중반향
12>현송원의 마지막 인사
13>3인방의 힘
14>다섯 번째 핀 사화
15>안개의 유혹
16>아방궁의 총성
17>겉과 속
18>여자의 향기
19>3인방의 정체
20>응당한 피해자와 억울한 피해자
21>하늘에 던져진 발자취
22>두 여자
23>김원흥의 역습
24>시련의 언덕
25>반전의 여인
26>개들의 개싸움
27>사화 여섯 번째로 피다
 
<25>반전의 여인
 
며칠 째 흐리터분하던 하늘이 오랜만에 활짝 개였다.
김원흥은 사무실에 나오자마자 기분 좋게 책상다리를 꼬고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기분이 안 좋을 수 없다.
그가 계획한대로 잡아들일 놈들을 전부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지방에 나가 은거하던 유진우도 잡았다. 그를 잡기까지는 용녀의 중언이 한몫 단단히 했다. 유진우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간다.
자강도의 깊은 오지에 살만한 집을 구해 놓고 차용녀가 이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유진우였다. 배신한 줄도 모르고 그따윌 여자라고 손꼽아 기다린 유진우의 순진성이 참 기가 막히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다.
물론 용녀의 토설을 두고 그걸 배신이라고 점찍기는 좀 그렇다.
엄마의 면전에서 한창 물이 올라 싱싱한 딸이 이름도 모르는 자에게 무차별강간을 당하게 생겼는데 그걸 보면서 버틸 여력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유진우 입장에서는 용녀가 거처를 알려줘 자기가 잡힌 것을 알면 충분히 배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짜 어리석은 건 유진우 자신이다. 어찌 한 줄에 꿰인 여자에게 마음 놓고 거처지를 알려줄 수 있냐는 거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짓고 도망간 줄 진정 모르고 있었다는 것인가? 뿐더러 국가안전보위부를 알길 아주 우습게 안 놈이다. 이제 두 년 놈을 대질 심문하면 그날 회의를 파탄 낸 자들의 정체를 아주 적나라하게 파헤칠 수 있다.
뭐라? 한창 열기가 오른 회의장의 조명을 꺼버려? 그간 수집한 정보도 있는 조건에서 뒤에서 조종이니 참정이니 뭐니 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내어 능지처참 할 수 있게 됐으니 그의 웃음집이 흔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고 천거한 황병시의 목줄도 이제 며칠 내로 끊어 놓을 수 있게 됐다.
그뿐 아니라 서재은과 선우향의 하는 행태를 보면 이건 분명 김정은의 목숨을 노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까 그걸 밝힐 증거만 확보해 놓으면 김원흥 자신은 정말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할 이 나라 정치계의 거물로 벼락불처럼 급부상할 것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내린 체포 작전이 실수 없이 막을 내리자 그때까지 침체됐던 기분이 아주 탈바꿈되어 마치 하늘을 날아갈 듯 가벼웠다.
조금 아쉬운 것은 선우향을 아직 체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건 무슨 우주에서 얻어 온 진드기 같은 꿀을 몸에 발라놓았는지 김정은이 도무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밤낮 끼고 흥흥거리는 여자를 이젠 그만하고 이리 가져오오. 잡아넣겠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괜히 푼수 없는 자의 기분을 건드려 공들여쌓은 탑을 스스로 무너뜨릴 필요는 없었다. 또 시야에 가둔 이상 그깟 계집에게 서둘러 오라를 지울 필요도 없었다.
그래 실컷 갖고 놀아라, 그만한 뱃심은 내게도 있으니까, 그는 배배꼰 다리를 쭉 내리 펴며 기지개를 켰다. 어깨도 시원하고 허리도 시원해진다.
험, 험 건기침을 해대며 16절지 문서종이를 박스에서 꺼내 프린터에 잡아넣고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은 다 아랫것들을 시켜도 되지만 이 사건만은 자신이 직접 작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러는 자신보다 더 먼저 일을 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모든 지시사항과 결재 받을 문서를 작성한 김원흥은 기분이 좋아 창가에 서서 어두워진 바깥을 내다보며 혼자 싱글벙글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숙이 빨아 후, 연기를 내 뿜는데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얼핏 습관대로 김정은집무실과 직접 연결된 빨간불이 켜진 흰 전화기를 봤지만 그건 아니고 본부장의 전화다.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부장동지, 텔레비전을 켜십시오.”
“왜? 재미나는 영화라도 하는가?”
“아닙니다. 지금 현송원이 모란봉악단 단장으로 부임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알아보겠습니다.”
“?”
내동댕이치듯 수화기를 놓고 허둥지둥 리모컨을 찾아 맞은 켠 벽 밑에 놓인 텔레비전을 향해 전원을 눌렀다.
군복차림의 현송원이 마이크 앞에 서서 연설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내리보고 올려 봐도 틀림없는 현송원이었다. 약간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앞의 말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하던 연설을 마무리 하는 단계였다.
“,,,저는 앞으로도 김정은 원수님의 참다운 문예전사로서 새롭고 참신한 예술작품을 더 많이 창조해 경애하는 원수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이 당의 문예전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길이며 영원히 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이 웅 웅 했다. 귀속에 손가락만한 벌레가 들어앉아 요동치는 것 같다.
그걸 달랠 여유도 없다. 그는 뚫어지게 화면속의 여자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죽은 현송원이 버젓이 살아 이제는 텔레비전 화면에까지 당당한 자세로 등장해 충성맹세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김원흥이 모를 수 없었다. 밖에서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렸다.
본부장이 들어서고 뒤이어 수사과장이 들어선다. 텔레비전을 끈 김원흥이 비상벨을 누르려다가 그들을 보고 주춤 손을 멈췄다.
본부장의 얼굴은 질리다 못해 하얗게 변했다. 두 사람은 독기어린 김원흥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용기가 없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들어선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저의 불찰입니다.”
본부장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불찰은 불찰이고 어떻게 사형한 여자가 살아 방송에 나왔는가 하는 거요. 말해 보우”
“,,,,”
“저, 이건 중앙당 조직지도부가 한 일입니다.”
본부장 대신 수사과장이 말했다.
“뭐라? 그럼 그날 죽은 건 대체 누구요?”
“부장동지께는 미안한 일입니다만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날 사형집행임박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본부장의 용기를 내어 말한다.
얼기설기한 그림이 김원흥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그림이 점차 선명한 색채로 제 모습을 찾는 순간 김원흥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당분간 비밀에 부치라는 지시 때문에 애써 처형소식을 함구했습니다만 전 부장동지까지 모르고 계실 줄은 미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김원흥은 본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꽥 소리 질렀다.
“죄송합니다.”
“한 마디만 묻겠소. 당신들은 대체 어느 편이지?”
뱉어 놓고 보니 스스로도 유치한 질문이다. 그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알만하니까 나가봐.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죄송합니다. 저희들도 일이 이렇게까지 승화될 줄은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원수동지께서 직접 명령한 것을 뒤집고도 이처럼 세상에 공개까지 할 줄은,,,”
“나가. 나가라니까,”
“알겠습니다.”
혼자 남자 갑자기 바닥이 허물어져 깊고 깊은 나락 속으로 곤두박질 당하는 환각이 왔다.
그는 머리를 싸쥐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흐른다. 방금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승기가 거꾸로 뒤집혔다.
비로소 영도기관인 당 중앙조직지도부를 향해 삿대질을 시작한 자신의 경망함이 아무쓸모 없는 헛짓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참담한 심정에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 그는 빨간불이 깜박이는 전화기 위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 다음 흐트러진 머리를 위로 쓸며 정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몸에 배인 습관인 것 같다.
“웬일이요?”
김정은의 웅근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저, 원수동지 보위부장 김원흥입니다. 다름 아니오라 현송원의 방송출현을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그게 왜? 반갑지 않은 거요?”
“원수 동지는 괜찮습니까?”
“처음엔 놀랐지만 이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허허”
“예? 무슨 말씀이신지,”
“방송이 시작되기 전 조연진의 전화를 받았소. 살아있는 송원일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워.
벌써 2년이 지났잖은가? 그토록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그 애가 내게 충성맹세를 하더라고, 보위부도 그런 일처리는 좀 배워야 할 것 같아. 영도자가 기분이 좀 더러워 과격한 명령을 내리더라도 실지 아까운 애들에겐 조금 여유를 두는 것도 나쁘진 안찮아. 그게 진정 수령을 진심으로 모신 충신의 도리가 아닌가? 송원이가 지금 내 앞에 와 있어.
그간 마음고생을 했는지 살도 빠지고, 근데 그게 더 예뻐 보이는 거 있지 참 대견해 허허허”
(이런 머저리 같은, 정신 빠져도 한참 빠졌군,)
속으로 욕하면서도 김원흥은 깍듯한 예로 인사를 하고나서 전화를 끊었다.
저도 모르게 후, 한숨이 나간다. 했지만 허탈감에 아랫다리가 후들거렸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천정에 대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한 번 지르고 나서 그는 낮 동안 작성했던 책상위의 문서들을 와락 밀어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구둣발로 사정없이 문대고 짓밟았다.
그래도 성차지 않아 씩씩대는데 따르릉- 긴 전화벨이 울렸다.
당조직부의 전화다. 한참이나 전화통을 쏘아보던 그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보위부장 전화 받습니다.”
“나요 조연진이요”
“예, 무슨 일이신지,”
“지금 부장동무의 심정이 몹시 복잡할 거요. 하지만 권하건대 형세를 바로 보았으면 좋겠소. 어떤 경우에도 상급을 무시하는 권력가는 그 자체가 권력을 포기한 자요. 어떻소, 내 말이 수긍되오?”
“알겠습니다만 조금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충분한 시간을 주겠소. 방금 팩스를 보냈소. 잘 처리해 주길 바라오. 지켜보겠소.”
대답소리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김원흥은 얼결에 고개를 돌렸다.
프린터에서 드르륵, 팩스 한 장이 뽑혀 나온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뽑혀 나온 종이를 집어 들었다. 들여다보는 눈이 화등잔처럼 커진다. 거기엔 선명한 화폭이 담겨져 있었다.
최용회가 저택 거실에서 선우향의 셔츠를 헤치고 가슴을 주무르고 있는 사진이었다.
놀라운 것은 여자의 표정이다. 거부감이 전혀 없는 미소어린 얼굴이다.
김원흥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폭죽소리마냥 터치는 웃음소리가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최용회를 직접 죽여라 이 말인가? 개자식들, 누굴 꼭두각시로 아나,)
투덜거리긴 했지만 한풀 꺾인 모습이다. 그는 사진을 쥐고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어처구니없는 사진이다. 하지만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진이기도 했다. 김원흥은 픽, 웃었다. 뚜벅뚜벅 구두징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이 사진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최용회를 체포해 단두대에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모든 자존심을 다 구겨 넣고 시키는 서방질에 불과한 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득세한 세력과 타협이 아닌 싸움으로 나간다면? 그건 정말이지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야 하는 마지막 싸움일 것이었다. 이제라도 납작 엎드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면 그로서는 아무 일없이 현 직책을 부둥켜안고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국가안전보위부장이란 거물급 권력자가 그렇게 순간마다 돌변해 타인의 발바닥에 발이 아닌 혀 바닥을 댄다는 것은 그로서는 허용할 수 없었다.
똥을 먹는 개도 때 묻은 주인이 아니면 고린내 나는 발 같은 것에 그 긴 혀를 너불대지 않는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한식경나마 방안을 돌고 나서야 그는 묘한 생각을 해냈다. 일이 어떻게 번질 것인가 하는 결과가 참으로 궁금했다. 늙은 색마 같은 최용회라는 자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도대체 몇 푼어치나 되는 것인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치밀었던 것이다.
김원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받은 사진공백에 내일 중이동으로 출두할 것, 하고 적고 그 밑에 국가안전보위부직인을 찍었다. 그 다음 최용회의 팩스번호로 전송했다.
책상에 앉아 그는 다시 사색에 잠겼다. 골백번 고쳐 생각해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결과만이 텅 빈 그의 가슴을 메운다.
애초 서른도 안 된 젊은 애를 국가 영수의 자리에 앉힌 것부터가 잘못된 일임이 이제 선명한 그림으로 떠올랐다. 또 그런 얼간망둥이 같은 자를 국가원수로 깍듯이 모시고 운명을 의탁한 것부터가 재앙의 시작이었음도 뚜렷하게 안겨들었다. 무조건 죽이고 처넣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건만 기분에 거슬려도 있을 수 있는 잘못도 목숨으로 보상해야 하는 비정한 이 세계에서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지금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의탁한 수령의 자질이 하늘의 신처럼 신비와 파워가 있을 때라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김정은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건 애초부터 응당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중이동 아지트에서부터 그와 뭔가를 공유하며 반대편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세력을 잡아보겠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그는 뼈아프게 자인했다.
일이 이쯤 되면 운명의 끝이 어디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김원흥이다.
비굴하게 배를 바꿔 타고 또 다른 주인을 향해 노를 젓고 싶은 생각은 꼬물도 없다. 그건 그의 자존심이 절대 허락 안한다.
일의 진행과정을 보면 직속부하인 본부장이나 수사과장 모두 당조직지도부의 하수인이 틀림없었다. 현송원 처형을 명령받은 보위기관이 어이하여 처형을 집행하지 않고 대신 다른 자를 내세웠는가 하는 것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나마 자신의 체모를 지키고 싶었다. 자신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든 자들에게 권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불사신도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싶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잠시 후 총무부에 휴가를 신청하고 교외에 있는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지금에 있어서는 어떤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앞길을 막는 우환덩어리로 보였다.
자신을 지키려는 어떤 숭엄한 결행의 길에 가족의 생명까지 나란히 세워 놓고 싶지 않았으므로 엄청 큰 부담으로 안겨 들 수밖에 없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어디라 없이 깜깜하다. 수도인 평양시내만 전기가 공급될 뿐 외곽지대와 지방은 지금쯤은 모두 정전이라는 현실을 김원흥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권력에 충실했을 때와 반대로 환멸을 느꼈을 때의 차이가 지금 현실로 그의 눈에 비쳐 들었을 뿐이다. 현실에 관한 감각과 평가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지금 충분히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김원흥이 별장안내원의 인사를 받고 안으로 들어설 그 무렵 문희동 최용회의 자택에서도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찌감치 집으로 와 서재에서 코냑을 마시던 최용회는 뽑혀 나온 팩스 한 장을 들고 오래도록 직시했다.
현재 최용회는 지난 유진우사건 이후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살다시피 지냈다. 여자 이빨이 이렇고 저렇고 한 다음부터 평시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자기를 멀리한다는 것이 대뜸 알렸기 때문이다. 글쎄 뭐 정치판에서 친구가 어디 있고 그쯤한 일에 머리를 혹사할 필요야 어디 있겠냐만 여느 일도 아니고 이성적인 문제였기에 눈치를 아니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순 쾌락을 위해 여성을 비하 학대한 행위는 말 그대로 변태성 질환의 단적 표현이고 증거였다.
최용회는 지금도 나이가 환갑을 지났지만 여전히 여자에게 꽂히는 욕망의 분출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실은 작은 키와 둥글넓적하게 생긴 그의 외모를 갖고서는 어디서든 여자에게 환심을 살 만한 구석이 없다.
설사 한밤중의 나체파티에 가서 주객으로 앉는 행운을 지녔더라도 변태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여인들의 반응은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벗고 한 덩어리가 됐다 해도 잔뜩 긴장되어 경계하는 애처로운 눈빛을 바라볼 때면 욕망과 달리 육체가 먼저 반응해 스스로 움츠러들게 된다.
그럴 쯤이면 벌써 감흥이라는 건 삼십육계줄행랑을 친지 오래고 하니까 안아도 맞춰도 아무런 멋도 맛도 없게 되는 것이다.
평시도 마찬가지다. 밤 생활이 어쨌든 밝으면 멋을 내 차려 입고 세상 도덕과 교양은 저 혼자 다 지닌 것처럼 점잔을 빼도 예쁜 이성을 보면 자연 눈을 힐끔거리게 돼 있는 게 수컷이다.
마주 선 여자가 인사치레로라도 방긋 웃어주면 저도 모르게 육신이 쩌릿해 기분이 상승하지마는 그러지 않고 눈을 깔고 지나간다든가 부르는데도 마치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으로 오해한 듯 힐끗 힐끗 눈 빨며 피해 갈 때는 진정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열불이 솟구쳐 뭣이든 아작 내고 싶어진다.
유진우사건 이후 최용회는 밖에서 늘 그런 대접을 받으며 산다. 집에 들어와도 마찬가지다. 마누라도 여자는커녕 돈 안 주고 부려먹는 심부름꾼 같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눈치가 확연히 달라졌다. 물론 식구이기에 겉은 그래도 속으로는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어쩔 수는 없겠다. 이젠 정말 자신 스스로가 먼저 부딪치는 상대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다.
그러하니까 조용한 서재에 틀어박혀 술을 마실 수밖에는 없다.
얼근히 취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시나마 다른 기분에 잠길 수 있어 서재에만 들어오면 병 채로 꿀꺽 꿀꺽 마셔 본다.
오래도록 프린터에서 뽑혀 나온 사진을 들여다보며 서 있던 그는 원탁위에 그걸 홱 뿌려 던지고 나서 또 독한 양주병을 거꾸로 쳐들었다.
그때 빠금히 출입문이 열렸다. 집일을 보는 아주머니마저 이젠 그를 우습게 알았는지 노크도 없이 자주 문을 연다. 하기야 두드려봐야 인척도 없으니까 그리하겠지만 말이다.
나이 든 아주머니지만 그리 찾아주는 것이 요즘의 최용회로서는 무등 반가운 일이다.
손에 든 과일쟁반을 원탁에 놓으려 하자 그제야 생각난 듯 최용회는 방금 얼치기처럼 멍해 들여다보던 사진을 얼른 원탁에서 집어 소파에 내려놓았다.
무슨 용단에 그리했는지는 모르지만 몸을 일으켜 원탁에 놓으려는 과일쟁반을 손수 받아드는데 사실 이러한 행동은 평시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머니를 따라 들어 온 애완용 개인 별이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그가 앉은 소파에 냉큼 뛰어올랐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아주머니가 나가려고 문을 열자 이놈의 별이란 놈이 소파에 놓았던 사진을 입에 물고 쏜살 같이 빠져 나간다.
별로 별에게 관심을 안 돌렸던 차라 그것도 못 보고 쪼개어 놓은 과일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본능적으로 소파 위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안 순간 그는 과일을 씹던 입을 벌린 채 그만 목석처럼 굳어졌다. 머릿속이 웅 웅 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빙그르르 방안이 거꾸로 회전한다.
어인일인지 이미 죽은 아버지가 천정에 떡 뻗치고 서서 자기를 내려다본다.
잔뜩 성난 얼굴이다. 아침이면 얼레빗을 들어 눈썹부터 빗어 내리며 아들을 향해 늘 훈시를 하던 아버지다.
“남자를 왜 사나이라고 하는지 아느냐? 이놈아 불알 찬 놈은 수하에 부하를 차야 사나이야.
남의 손가락질에 따라 육신을 움직이겠거덩 아예 불알 떼서 개를 줘. 그게 사나이거덩”
훗날 커서 불알처럼 데룽데룽 수하에 부하를 찼을 적엔 또 이런 말을 했다.
“네놈도 이젠 계집을 찰 때가 됐겠다. 계집이 뭔지 아느냐? 안 계집은 집이고 바깥 계집은 물이거덩. 그것도 모르면서 네 놈 육 덩어리가 하자는 대로 했다간 평생을 구정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썩어지고 마느니라. 알아들었느냐 이놈아?”
평생을 무장으로 살아 온 무식한 아버지의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백번 옳은 말이다. 취중에도 최용회는 천정에 대고 어, 어 탄식했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울부짖음이었을 것이다.
독이 오른 마누라가 별이가 물어 온 사진을 손에 들고 서재의 문을 여는 순간 탕, 하는 외로운 총성이 안에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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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19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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