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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문학

'포 플라워' 제 23화

글 | 신준식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포 플라워 (four flower)
-작가 소개-
 
이지명
 
전 북한작가
청진1사범대학 어문학부 통신대학 1985년 졸업.
작가동맹 현직 작가로 있다가 2003년 탈북 2004년 대한민국 입국
한국소설가협회회원,
 
Intro
북한망명작가 이지명의 장편소설 <포 플라워, four flower>.
2014년 11월 10일부터 뉴포커스에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재에 앞서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이 소설은 김정은의 첫 사랑이었던 주인공 서재은의 복수를 통해 북한정권 내 실세들의 권력암투의 추악함과 독재정치의 비정함을 그려낸 소설입니다. 소설은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과 실존 인물들에 기초해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단 김정일과 김정은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실명에서 조금씩 변형된 이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없는 불합리한 체제 속에서 사상과 노선에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은 도대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그려 보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여주인공 서재은은 북한에서 살아가야 하는 가장 평범한 존재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자신의 첫 남자 김정은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가 복수를 이루어 내는 모든 과정을 저는 이 소설에서 그려가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북한의 현 정권 실세들이야말로 수천만 인민들의 몸과 영혼에 서식하는 기생충과도 같은 무리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불과 수십 킬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저 휴전선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소위 ‘최고 존엄’이라 일컬어지는 존재의 실체와, 그 기이한 실체를 떠받치고 있는 이상한 집단의 진면목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북한으로부터의 망명 작가들만이 알 수 있고, 전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이곳의 독자들이 ‘인간’을, ‘인간의 삶’을. 그리고 ‘인간의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사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피를 찍어 쓰는 심정으로 연재를 시작하는 장편소설 <포 플라워, four flower>에 독자 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0월 20일 부악문원에서 이지명
 
목차
1>상처의 반란
2>참정의 눈
3>대장 집 안방
4>무도의 총소리
5>허탈
6>마지막 진술
7>딸을 찾는 아비
8>충신의 내면
9>음모의 합작
10>서재은의 계략
11>군중반향
12>현송원의 마지막 인사
13>3인방의 힘
14>다섯 번째 핀 사화
15>안개의 유혹
16>아방궁의 총성
17>겉과 속
18>여자의 향기
19>3인방의 정체
20>응당한 피해자와 억울한 피해자
21>하늘에 던져진 발자취
22>두 여자
23>김원흥의 역습
24>시련의 언덕
25>반전의 여인
26>개들의 개싸움
27>사화 여섯 번째로 피다
 
<23>김원흥의 역습
 
무슨 일이든 발판이 든든해야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김원흥은 무언가 아작 내려고 딛고 섰던 발판이 곧 썩어버릴 칠성판 같은 거라는 걸 문득 알아버렸다. 그대로 숙어들어야만 하는가? 아니,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해보고 싶었다.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깟 목숨하나 내 놓으면 되는 것일 뿐, 국가안전보위부장이라는 자가 눈앞에서 설쳐대는 역적들의 정체를 뻔히 알면서도 발판타령이나 하며 물러나 앉는다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싸움을 시작도 안 해 보고 주저 않는다는 것은 절대 그의 심중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다.
승패에 묻어올라오는 진위는 싸움 끝에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는 문제였다.
이대로 물러 않는다 해도 자신에게 차례지는 결과는 싸움 끝에 진 결과와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겨야 했다. 무조건 싸워 이겨야 했다. 흘러가는 밤 강물을 바라보며 그는 나름대로의 싸움 안을 세밀하게 짜본다.
따져보고 또 무언가 계산해 보며 버들숲속공지에 무수한 발자국을 찍는 그의 모습은 어찌 보면 정신 줄을 놓은 미친 자의 몰골 같기도 했다.
새벽 세시 경 국가안전보위부에 비상이 걸렸다. 자기집무실 테이블 앞에 꼿꼿이 선 김원흥은 수화기를 엇바꿔 쥐며 통화가 되는대로 요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호를 연속 불렀다. 아마도 출동명령 같았다. 모두 단마디로 옛, 옛 하는 날 선 대답들뿐이다.
급한 지시와 그에 복종하는 충견들의 움직임으로 내부는 소란스러웠으나 밖은 고요한 정적 속에 묻혀 있었다.
 
인적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거리로 한 대의 벤츠가 소리 없이 달렸다.
대성산 쪽에서 오던 벤츠는 개선문을 거쳐 중구역으로 들어선다. 김일성광장에 들어서기 전 좌회전한 벤츠는 속도를 죽이고 옥류교에 들어섰다. 옥류 대교를 건너서면 대동강구역이다. 구역종심을 가로질러 달리던 벤츠가 들어선 곳은 문희동의 한적한 솔숲이었다.
아담하게 자란 솔숲에는 너른 부지의 개인 주택들이 들어앉은 것이 낮이라면 군데군데 보였을 것이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그 모든 것이 어둠속에 잠겼지만 차는 분명 목표를 향해 곧바로 나아가는 듯싶다.
검문소가 있었지만 이미 연락이 되었는지 마주 선 군인은 거수경례까지 붙인다. 차가 멈춘 곳은 건평 250여 평에 달하는 조선식으로 지은 커다란 건물이었다.
보초병이 있는 대문은 벌써 열려져 있었다. 집은 엄청 크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차가 멈춰 서자 키가 늘씬한 여자가 내렸다.
착 달라붙는 검은 바지에 위에는 가죽잠바를 걸치고 눈에는 얼굴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꼈다. 밤색 멜 가방을 메고 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었다.
보매 선우향의 모습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녀가 왜 이 밤에 여기까지 왔는지,
넓은 정원을 지나 쌍 문으로 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남자가 깍듯이 인사를 하며 그녀를 어느 한 방으로 안내했다.
겉은 조선식이지만 집안은 모두 외제로 무장한 화려한 풍경이었다.
객실 같아 보이는 너른 방에는 기다리고 있은 듯 뚱뚱한 사내가 ㄷ자 형으로 놓인 긴 소파 앞의 일인소파에 앉아 들어서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여자가 깍듯이 인사를 하자 “앉아” 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이 사내가 바로 총 정치국장에서 물러나 중앙당 비서로 등용된 최용회다.
여자가 앉으며 얼굴에 쓴 선글라스를 벗는다. 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선우향이었다. 선우향은 가지고 들어 온 바이올린 케이스를 소파 옆에 세워 놓고 가죽잠바를 벗었다. 하르르한 천으로 지은 반팔 셔츠만 입은 어여쁜 상체가 나타났다. 볼록한 가슴이 유달리 정감 있게 사내의 눈 뿌리를 긁은 듯 음, 음 건 거래를 톱고 나서 최용회가 한마디 한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인가?”
“아시면서요. 원심관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리 쉽게 놔 주던가?”
“몇 달 잘 있었잖아요. 첫날만이야 하겠어요?”
“허 참 그러니까 뭐야. 그 녀석이 싫증을 느낄 때면 내게로 오는 거냐?”
“그게 약한 자의 설음이 아닐까요? 어쩔 수 없잖아요.”
“한데 목소리가 왜 그리 변했어?”
“몸살이 왔나 봐요. 밤낮 벗겨놓고 지랄을 하니 어디 견딜 수 있어야지요.”
“흠, 원래 사내라는 게 다 그래, 널 이렇게 밤중에 내 놓는 걸 보니 이젠 슬슬 싫증이 났다는 건데.”
“상관없어요. 애초 내 눈엔 그가 남자로도 안 보였으니까요. 내겐 당신이 유일합니다.”
“그래? 어쩌지, 이젠 나도 슬렁슬렁 지겨워 지는데,,,”
“하기야 딴 사내한테 실컷 농락당하는 계집인데 어련하겠어요? 근데요 왜 절 불렀어요?”
“몰라서 물어? 내가 널 괜히 품에 안고 춤을 춘 줄 알아? 애초에 우리 약속했잖아”
“알아요. 내가 필요할 때 당신을 협조하기로 한 걸”
“그럼 말해 봐”
“음, 그간 김부장이 몇 번 왔었고, 그리고 원수님 두 남매가 와서 술 마시다 갔어요. 김정출은 끝내 정계출현을 거부했고요.”
“그게 정말이야? 정출이가 출세를 거부했다? 허허허”
최용회가 너털웃음을 웃는다.
“그렇게 웃을 일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왜, 넌 안 웃겨? 참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정치가 뭔지 알기나 아는가?”
“모르니까 그만둔 것 아니겠어요?”
“그렇긴 해 정출이 걔는 그래도 뭔가 아는 것 같군 김부장은 왜 왔다 갔지?”
“아무래도 최차수 당신을 잡으려는 것 같아요.”
“뭐야? 나를 왜?”
“그거야 본인이 생각해 봐야지 나한테 물음 어떻게 해요?”
“뭐라 했는데?”
“새로 총국장이 된 황병시와 당신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연관성이 있어 상호간 빚을 갚는 의미라나 뭐라나. 혹 황병시라는 사람과 저번에 널 살려 줬으니 이번엔 날 살려라 뭐 그런 관계예요? 그런 식으로 말이 오가던데요.”
“정말이야?”
“제가 그런 거짓말을 어떻게 해요. 만들어 내겠어요?”
최용회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몇 걸음 걸으며 눈을 굴리던 그가 다시 여자에게 묻는다.
“그 다음엔 뭐라 했지?”
“상황이 상황이라 똑똑히 못 들었지만 그런 게 다 곁가지 현상이니 제때에 뿌리 뽑아야 한댔어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 틀림없는 정보지?”
“그럼요 제가 왜 당신을 배신하겠어요. 절 이 왕국에 안착시켜 준 사람이고 첫 남잔데요.”
“한데 어찌 그 고비를 넘겼지?”
“뭘요?”
“원수라는 젊은 애한테 남자경험 있는 여자는 같이 동침할 수 없잖아.”
“쳇, 제가 직접 검사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도 못 넘길까봐서요? 날 무슨 머저리로 아나 봐요.”
여자가 뾰로통해지자 최용회는 급히 걸어와 그녀를 살며시 안아준다.
“하긴 거기까지 갔다가 숫처녀가 아니라는 판정이 나면 살아나올 수도 없지, 그러고 보면 넌 보통사람이 아니야 그냥 해본 소리니까 속에 담아두지 마라”
“됐어요. 별걸 갖고, 그만 지껄이고 어서 가슴이나 만져줘요.”
“알았어.”
최용회는 여자의 엷은 셔츠 안에 통통한 손을 얼른 들이밀었다. 부드러운 가슴의 촉감이 그렇게 좋은지 그는 지그시 눈까지 감는다.
만약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혹 바이올린케이스에서 연하게 깜박거리는 가는 불빛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미니카메라가 어김없이 이 장면을 렌즈에 옮겨간 것은 분명했다.
두 손 다 집어넣고 여자의 가슴을 취하던 최용회는 여자가 우뚝 일어서자 얼른 손을 거두었다.
“가볼게요. 시간 다 됐어요. 그 녀석이 일어나 날 찾으면 곤란하거든요.”
“그래 가야지, 언제면 너를 안고 긴 밤을 보내게 될까, 이젠 널 내보냈으면 좋으련만,”
“이 살육전이 끝나야겠죠. 조심해요. 총국장에서 비서로 옮겨 앉았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에요.”
“알았다. 내가 있어야 네가 있겠지. 걱정 마 살 테니까. 널 두고 절대 죽지 않아”
선우향이 차를 타고 대동강가에까지 달려왔을 때는 벌써 동녘이 희붐히 밝기 시작했다.
차안 뒷좌석에서 여자는 머리에 쓴 실리콘가면을 벗는다. 그녀는 다름 아닌 서재은이었다.
그녀는 바이올린케이스에서 미니카메라를 분리해냈다.
그걸 안주머니에 건사하는 순간 “이상합니다.” 하고 운전을 하는 요원이 소리쳤다.
차는 벌써 옥류교에 들어섰다. 다리 중간에 철근을 잘라 만든 삼각대까지 내 놓고 사내 여럿이 버티고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모두 자동총을 들고 있다.
그걸 보며 서재은은 바이올린케이스 안에서 휴대용 권총을 꺼내 든다.
“천천히 몰아요.”
짧은 순간이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물결쳤다. 이 상황을 벌써 눈치 챘다는 것인가? 누가?
군부? 아니 그럴 순 없었다. 3인방은 이미 군까지 모두 장악하고 있는 판이다.
그렇다면 국가안전보위부? 재은은 비로소 머리를 끄덕였다. 김원흥이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리자 그녀는 입술을 옥 물었다.
“차를 세워요.”
“예?”
반문하면서도 요원은 차를 세운다.
“이제부터 내 말 명심해 들어요. 내가 나서면 기회를 봐 차를 후진시켜요.
어떻게 하든 살아서 이 미니자동카메라를 대성산 아지트에 전해요. 만약 못한다면 당신은 내 손에 죽습니다.”
“알겠습니다.”
서재은은 안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요원에게 넘겨주고 차에서 내려섰다.
저쪽에서도 마주 걸어왔다. 뚜벅뚜벅 콘크리트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만 요란했다.
재은의 걸음이 빨라졌다. 될수록 차와 멀리 떨어져 그자들과 접전하려는 속심 같다. 다가오는 자들은 모두 총을 들었지만 다행이 사격은 하지 않는다.
잠바 뒷주머니에 총을 감춘 서재은의 발걸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위압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듯이, 딱 딱 징소리가 고조로 울리다가 딱 멎는다.
“무슨 일이죠?”
“당신이 서재은이지?”
“그래요. 그런데요?”
“체포해”
우두머리인 것 같은 사내의 짤막한 명령소리에 와락 다섯 명이 요원들이 서재은을 덮친다.
하나 번개 같은 타격에 두 명의 사내가 양 옆으로 뻗는다. 앞으로 달려들던 사내는 여자의 발에 면상을 채워 비명을 지르며 입을 싸쥔다.
“그래봐야 소용없어. 너의 죄만 더 늘어날 뿐이지”
“왜? 왜 날 잡으려 하는 거죠? 이유나 좀 압시다.”
“그건 우리도 모르지 다만 역적이라는 것 밖에는,”
그 자가 총을 쳐든다. 탕, 그보다 서재은의 손에서 더 먼저 총탄이 발사된다.
손목을 맞은 그 자가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린다. 흘깃, 짧은 순간이지만 서재은이 뒤를 돌아본다. 벤츠의 존재는 벌써 다리에서 없어졌다.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쉼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공중에 뜬다.
탕, 탕 잡으려는 자들의 쏜 총알이 그녀가 섰던 자리를 강타함과 동시에 서재은은 난간을 넘어 대동강물 속에 뛰어내렸다. 떨어지면서도 다리위에 대고 연속 탄알을 날린다.
잠시 움츠렸던 요원들은 첨벙, 소리가 나자 그때에야 마치 경쟁하듯 강물로 뛰어들었다.
물 위에서 사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오년 동안 외진 무인도에서 거친 바닷물과 살아 온 여자를 당할 힘은 어느 요원에게도 없는 상 싶었다.
다섯 명 모두 기진맥진해 헐헐 기슭을 향해 헤엄칠 때 서재은은 유유히 반대 쪽 기슭으로 누운 헤엄을 쳤다.
이른 아침의 찬 강물은 살을 어이는 냉기를 몰고 왔지만 그만한 것에 힘을 놓을 육체가 아니었다. 그녀는 밝아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곧 해가 뜰 것이다.
석 대의 요트가 물갈기를 날리며 쏜살 같이 접근해 온다. 잠간 그걸 바라보던 여자는 이내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것도 잠간, 숨이 차올라 입만 내밀고 숨을 쉬는 찰나 무수한 총탄이 주위를 들쑤신다. 주머니를 뒤져 피복선을 찾아 낸 재은은 그것을 입으로 물어 끊고 여러 겹으로 된 구리선을 간신히 잡아 뽑았다. 물속이라 그런지 생각 외로 안의 구리선이 애먹이지 않고 뽑혀 나왔다. 바이올린소리 확대를 위해 스피커에 연결하는 전기코드선이다.
세 뼘 정도의 길이인 비닐관이 냉큼 그녀의 손에 쥐어진 셈이다. 끝을 입에 물고 다른 한쪽 끝은 손으로 잡아 물밖에 내보냈다. 약한 선이여도 조금 숨이 트였다.
가슴이 답답했지만 견딜만 했다. 발과 다리 한 팔로 몸 중심을 유지하며 서재은은 정처 없이 흘러내려갔다. 무장한 요트는 엇갈아 그가 잠수한 강물 위를 살폈지만 종내 찾아내지 못했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하여 흐려진 물인데다 많이 불어나 파도처럼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 약한 관을 물고 떠내려가는 작은 몸뚱이를 찾아내기란 용의한 일이 아니었던 듯싶다.
아마도 죽었다고 단정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요트의 발동소리가 멀어지자 서재은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빠른 물살 때문인가?
벌써 요트는 아득히 보이고 마치 바다처럼 넓은 하류로 자신은 정신없이 밀리고 있었다.
강 중심이다. 이대로 흘러가다간 종내 강물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위구가 뒤따랐다. 비로소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서재은은 입술을 사려 물고 강기슭을 향해 최후의 힘을 모아 헤어가기 시작했다.
인간총구는 피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자연의 횡포 앞에 다시 적수공권의 몸을 내댄 셈이다. 사품 치는 물살에 밀리며 서재은은 한 치 한 치 기슭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붉어졌던 동쪽하늘로 검은 구름장이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변덕스런 날씨는 이내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힘이 진해 잠간 주춤하는 사이 몸은 사정없이 밀려 다시 강폭으로 쏠린다.
재은은 마침내 이 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힘에도 버티려는 의지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서재은은 출렁이는 물결위에 반듯이 누웠다. 흐르는 대로 떠내려 갈 뿐 더 이상 물살을 가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덮쳐 온 물결이 마치 파도처럼 그녀의 얼굴에 물을 들씌운다. 흙탕물이 입을 거쳐 목구멍을 넘었다.
그 통에 물속에 잠겼던 재은은 마지막 힘을 모아 몸을 솟구치고 또 물위에 누웠다. 양 손 양 팔로 물을 휘저어 간신히 몸을 유지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못 견디게 그리운 얼굴들이 비를 쏟는 구름사이에 그림처럼 떠오른다.
늘 밝은 미소만 보여주던 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며 두 아들 몰래 좋은 음식이 생기면 숨겼다 슬그머니 꺼내주곤 하던 어머니, 오빠들도 그랬다. 뭐나 색다른 건 모두 자기에게만 갖다 주곤 했다.
훗날 친 아버지를 만나 알았지만 식구들은 재은을 친자식, 친동생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었다. 한 세상을 그렇게 사랑을 받으며 살다 문득 가버린 식구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내심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복수는 그녀의 생의 전부였고 이유였다.
한데 이제는 더는 어쩔 수가 없다. 힘은 점점 진해 오고 몸은 자꾸만 아래로 처진다.
이제 팔을 멈추면 물살은 사정없이 그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래도 못다 한 복수자들에게 잡혀 죽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움직이던 다리를 힘없이 아래로 드리웠다.
-용서해요 아버지 엄마, 저도 이젠 그만 따라갈게요.
흙탕물이 덮쳐 온다. 원통했다. 패자인 자기를 보고 웃는 악마의 얼굴이 확대되어 다가온다. 반드시 죽여 버리려 했었다.
죽여서 아버지에게로 끌고 가려 했다. 끌고 가서 제발 잘못했다고 두 손 비비며 무릎 꿇리려 했다. 하나 이제는 모든 것이 틀렸다. 그녀는 비감의 눈물 한 방울을 머금고 천천히 물속에 가라앉았다.
아마도 기적이 있다면 가장 요긴한 시점에서 인간의 의지를 보고 머리를 숙이며 찾아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를 물에 잠그며 다리를 아래로 드리운 순간 재은은 다시 온 몸에 힘이 와짝 솟아오름을 느꼈다.
발이 바닥에 닿았던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깊이가 사람 키를 넘지 않는 강 여울목에 이르렀다. 물살은 빨라도 새 힘을 가다듬은 그녀를 이제 더는 쓰러뜨리지 못했다.
한 발 두 발 강물과의 힘겨운 사투 끝에 넓은 여울목에서 간신히 기슭에 닿은 재은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젖은 풀밭에 힘을 잃고 쓰러졌다.
농민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 조심조심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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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1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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