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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7] 인간이고 싶다

| 최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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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고 싶다

(탈북작가 김혜숙)

 

17. 혼인신고

 

싸락싸락 - - 또 싸락싸락 --

 

끝없이 뻗어간 드넓은 벌판에 가늘고 뽀얀 봄비가 상기된 볼을 식히며 내리고 있다.

 

우리는 긴 시간 멎지도 않고 굵어지지도 않는 앞을 가리며 내리고 있는 이슬비 속을 무려 세 시간 째 걷고 있었다.

 

포장도로 양옆으로 끝없이 뻗어간 볏모를 옮겨 심은 다락논들에 찰랑 살랑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자그마한 포물선을 그리며 아롱아롱 무지갯빛으로 퍼져나간다.

 

논판에선 실낱같은 한 뼘 남짓한 벼 포기들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작은 물줄기에 몸을 맞기고 파르르 떨고 있는데 엄마를 잃은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목청 돋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말을 안 듣다가 죽은 담에 물가에 묻어 주었다는 청개구리 이야기가 떠올라서 갑자기 서늘한 감정이 한쪽 가슴을 스쳤다. 하지만 지금 저지른 엄청난 행복이 행여라도 사라질까 두려워 애써 지워 버렸다.

 

얼마나 말없이 오래 걸었을까.

 

머리 하나가 더 큰 남자는 얼굴을 한껏 숙이고 사랑스런 여자를 내려다본다.

 

스커트가 쩍 달라붙어 걷기가 힘들게 드러난 허벅지 사이로 물줄기가 축축이 흘러내린다.

 

남자는 물이 떨어지는 굽실거리는 젖은 머리카락을 체머리로 흔들어 떨어버리고 젖은 큰 눈을 슴벅이면서 허리를 구부정히 하여 온통 물주머니가 되어버린 말랑해진 여자의 날씬한 허리를 젖은 긴 팔로 살포시 감아 안았다.

 

이제 참말로 자기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여자의 젖은 가슴 사이로 또렷이 드러난 단단하고 조그마한 흰 젖가슴이 반쯤 내려다 보였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퍼져나가며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두 사람은 꿈같은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불타는 눈동자를 마냥 서로 확인하며 물이 줄줄 흐르는 손을 꼭 잡고 눈물이 흐르는지 빗물이 흐르는지 모르는 얼굴을 마주 비비며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높은 폭소를 터트렸다.

 

"아--하하 아 -- !" 길~게 길~게 소리쳐 본다.

 

아침에 타고 떠나왔던 통근열차가 돌아가는 정오의 기적소리가 벌써 두 번째 울려왔지만 우리는 역으로 나가지 않고 그냥 이렇게 걸었다.

 

약속도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는 길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이 함께 가야 할 발걸음의 시작일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좋았다.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힘든 일은 이제 다 지나갔다.

앞으로 다가오는 공포는 걱정해야 아무 소용이 없을 만큼 무의미하다.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며칠 전 그이는 아직 거주지로 되어있는 북계천 마을에 어머니를 한번 뵈러 가자고 제의해왔다. 먼저 부모 상견례를 하는 게 통상적인 의례이지만 우리 집에서 3년째 반대하고 있으니 한쪽 집에서라도 허락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무하 어머니는 요양소에서 치료 받으신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선 잘 지내셨지만 이곳 산골에서 고된 일에 시달리고 영양상태 나빠지자 건강이 악화된 때문이었다. 시내까지 오시기는 무리라고 우리가 한 번 여행 삼아 시골에 다녀오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무척 그와 함께 다니고 싶었던지라 나는 직장에다는 휴가 신청을 하고 어머니에게는 방송출장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앞날의 아씨를 맞이한 산골의 집은 명절 분위기였다. 송이버섯이며 노루고기며 산골의 귀한 것을 다 마련해 놓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련하고 세련돼 보이는 도시 아가씨가 곧 맘에 드셨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남자는 결심한 듯 떠나오기 전에 산골 분주소(파출소)로 여자를 데리고 갔다. 파출소 정원 나무의자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여기서 우린 새로운 운명을 결정하는 거야. 너무 오랫동안 끌어 왔어. 이제 설아의 식구를 납득시킬만한 능력이 내게 없다."

 

평소에 말을 잘 안하는 그이의 젖은 음성이 참으로 아프게 간간히 끊어지며 들려왔다.

나이 연소한 여자를 이끌고 결단한 일이 남자도 무척 힘든 모양이었다.

그는 힘들게 말을 잇고 있었다.

 

"……, 나 너무 힘들다. 음……, 누추한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살게 된다면 그땐 부모님의 뜻을 거역했던 오늘을 당신들도 이해해 주실 거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오래 동안 침묵을 지키는데 시간은 빨리도 흘렀다.

아침 8시가 조금 지나 파출소 문 여는 시간에 도착한 후로 벌써 정오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시골 분주소(파출소)라 서너 명 밖에 안 되는 보안서 실무자들이 다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갑자기 언젠가 이렇게 그이와 헤어졌을 영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또다시 그를 아프게 하는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여기서 네가 결심을 못하고 더 지체하면 우린 헤어지는 거야."

 

 

마지막 음성이 결단하듯 그리고 조금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며 간간히 끊겼다.

어쩌면 이 순간이 지나면 내가 사랑이라고 이름 지은 이 사람을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가슴이 무너지는 듯 아파오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까만 비닐 신발 위에 뚝하고 떨어졌다.

 

드디어 나는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살게 된다면 그땐 부모님의 뜻을 거역했던 오늘을 당신들도 이해해 주실 거야"라는 남자의 이 말을 간신히 위안으로 붙잡으며 자신 없이 머리를 들었다.

 

우리는 곧 결혼 신고서를 작성했고 도장을 눌렀다.

……

 

파출소를 나올 때 조금씩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방울이 예쁘고 긴 머리카락을 타고 흥분으로 상기된 가녀린 얼굴과 흰목과 하얀 블라우스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난 추운 줄을 몰랐다.

나는 하늘이 우리를 축복해 주고 있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찌 되었던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하나가 둘이 되었다

이제 싱글로 살아온 나날은 여기서 정리되었지만 이 세상을 함께 같이 갈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서로에게 너무 좋았다.

 

결혼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결혼식을 하기 전에 등록(혼인신고)을 해버렸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난 누가 강요한 사람도 없이 누가 내놓은 제도인지도 알지 못하는 그 종잇장 하나에 인생의 전부를 맡긴 것이다.

그때 나는 그것을 운명이라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스스로 빠져든 인생의 강에서 그 후 나는 많은 나날들을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슴 쓰리게 그 날들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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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7-17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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