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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6] 인간이고 싶다

| 최다미   

이미지

인간이고 싶다

(탈북작가 김혜숙)

 

16. 사랑

 

어느 날 결국은 나에게 프러포즈해 버린 무하 오빠가 너무나 서먹하고 낯설었다.

 

흑인가수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바리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레코드에서 애절하게 흘어 나오고 있었다.

 

오렌지동산 향기는 언제나 변함없건만

굳게 맺은 그 약속을 그대는 잊었느냐

정다운 그대는 가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잊지 못할 그 언덕에 홀로 피는 물망초

내게로 오라 나를 잊지 말고서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빠 방에는 선택된 문화예술인들만 들을 수 있는 레코드며 참고도서인 세계명작들 고전들과 함께 오빠 자신의 작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방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무하가 들어섰다.

 

갑자기 방이 컴컴하고 좁아진 듯했다.

 

남자는 상대방을 바라보지 못하고 창으로 비쳐드는 저녁황혼에 빛나는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초콜릿같이 부드럽고 축축해 보이는 큰손을 곧게 펴고 말없이 잡아 줄 것을 바라고 서 있었다.

 

그 손은 마치 이손을 잡지 않으면 평생 다시는 못 볼 것이라고 선언하는 듯 나를 한참동안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다르다. 그는 무엇이나 달랐다.

 

나는 한창 소녀를 벗어나 대학동기들과 주변의 남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혼기의 세대였다. 해서 누가 나의 왕자님일까 하고 종종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 나이 누구나 그렇듯이 남친과 데이트 하면서 영화구경도 가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나름대로 프러포즈를 받아본 경험도 있었으나 이런 식은 처음이었다.

 

처녀에게 온갖 좋은 모습을 다 보이고 싶은 사내들은 여성에게 다가갈 때 가장 정중한 모습을 가장한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혹은 "좋아한다" 하거나 아니면 소심한 축들은 편지도 보내온다. 그리고 내가 받아줄지도 모르면서 반지며 핀 같은 제 나름대로의 자그마한 선물도 준비했다.

 

작업이 좀 진행되고 시간이 흐르면 길가면서 슬그머니 손을 가볍게 잡아주기도 하고 미끄러운 길을 이끌어 주기도 한다. 특히 연상의 사내들은 좀만 가까워지면 어깨에 손을 다정히 올려놓기도 하고, 때론 어떤 터프한 축들은 좀만 가까워지면 장난하듯 목을 끌어당기고 갑자기 스킨십을 시도하다가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

 

인생에 누구나 체험하는 일상사가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다.

 

나는 부끄럽고 쑥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섰다가 금시 활활 타버릴 것 같은 귓부리의 따가움을 느끼며 다급히 미닫이문을 열어젖히고 쏜살같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는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통 알 수 없었다.

 

그렇게도 무례하게 나를 당황하게 만든 그 사람이 참으로 어이없기도 하고 남다른 그의 프러포즈 방식이 신기하기도 했다.

 

시원한 바람이 아파트 앞의 가로수를 흔들며 나의 달아오른 볼을 식혀 주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철길 위에 섰다.

 

오빠처럼 한 집안 식구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함께 지내온 그 사람, 그 앞에선 어깨를 드러내고 가슴이 절반 쯤 파인 자리옷을 입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깊은 밤 침실에서 사춘기의 성을 느끼게 하는 소설책을 보다가 몸이 달아올라 물 마시려 나왔다 가도 거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를 아무 스스럼없이 마주 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고 있던 소설의 여주인공들인 "테스" "안나 카레니나" 혹은 "제인 에어"를 들먹이며 소설 감상을 피력하고 밤새워 설레는 이야기를 펼쳐가도 아무런 이성을 느끼지 못하던 그냥 오빠였다.

 

축축이 젖어 살에 달라붙은 실내복 바람으로 실에서 허벅지를 드러내고 빨래를 하다가도 그가 들어오면 서슴지 않고 문을 열어 재끼고는 "오빠! 양말 벗어주세요" 하고 소리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던 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남자라니……. 그것도 다른 남자친구는 전혀 무시할 만큼 숨이 막혀오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황당했다.

 

아무 대답 없이 돌아서버린 나에게 서먹해진 그가 아파트 아래 유치원 어린이 공원에서 애들과 공을 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람한 체격에 큰 눈이 빛나는 이 사람을 애들이 참 좋아한다.

 

…….

멀리서부터 길에서 마주칠 때 보면 남자의 가무스레한 피부의 얼굴색과 대조되어 유난히 하얀 이가 붉고 투명한 두툼한 입술 안에서 보석 같이 반짝이곤 했다. 파란 하늘을 담은 달빛 같은 큰 눈동자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수줍게 슴벅이며 환한 미소를 짓곤 했다.

 

모든 것이 좋게만 보이고 뽀얗고 아롱다롱한 무지갯빛 안개 속에 촉촉이 잠겨 있었다. 주위에 온통 그가 꽉 차 있는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차츰차츰 조여 오는 남자의 분위기가 어쩔 수 없는 코너로 나를 몰고 가고 있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 신기루 같고 터프한 매력으로 점잖게 한걸음씩 다가오는 그 사람 앞에 나는 너무나 작은 존재였다.

 

그 손을 금방 잡지 못하고 헤어진 그날 그를 아프게 한 것 같아 몹시도 미안스러웠던 나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의 큰 손을 잡기로 했다…….

 

깊어가는 밤하늘이 유달리 반짝이는 별무리를 투명한 비로드 치마폭 같은 푸른빛으로 품고서 고요히 숨을 죽이고 두 청춘 남녀를 지켜보고 있다.

 

멀리 바다와 잇닿은 사아천에 호수같이 잔잔한 물결이 소리 없이 흘러간다.

 

강변의 모래톱에서 자라는 산토닌 쑥밭에서 나는 씀씀한 향기가 코를 아련히 자극한다.

 

스커트의 포켓레이스를 접어서 겨우 가린 허벅지 밑으로 축축한 습기가 올라왔다. 그러나 나는 그 습기도 땅거미의 차가움도 아랑곳 않고 뭔가 막연한 이성을 느끼며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꿈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는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손수 설계한 이층집 전원주택과 프로그램화 되어있는 전자식 부엌 얘기를 꿈결같이 들려주었다. 그리고 정원에 심어 가꿀 크고 싱그러운 포플러와 향기 가득한 장미넝쿨로 둘러친 돌담이며 늘 그때그때 뽑아 먹을 수 있는 친환경 부추며 상추, 마늘과 풋고추를 줄맞추어 손수 심은 아름다운 정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가 말하는 나와 함께 할 결혼생활의 아름다운 꿈은 늘 나를 황홀한 내일로 이끌어 갔다.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동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것 같았다.

 

그의 내면은 다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생활관은 출세와 나라에 대한 충성에 희망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테스터와 방사선연구기록부가 들려있는 대학생 가방을 언제나 경계선이라도 그은 듯 자신의 검은색 바짓가랑이와 곁에 앉은 나의 스커트 사이에 놓았다.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침묵으로 앉아 있을 듯 하다가 불쑥 나에게 세레나데를 청하곤 했다.

 

고요한밤 나의 그대 노래 부르네

나무 잎은 속삭이네. 달빛 아래서 달빛 아래서

우리 사랑 알려질까 두려워 말아 두려워 말아

아름다운 그 노래에 산란한마음 타오르는 이 마음을

그대 아는 가 그대 아는가

불길 같은 나의 사랑 나에게 오라 나에게 오라

 

 

연인의 맘에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소녀의 마음을 담은 청아한 멜로디였다. 조용한 풀벌레 우는 소리와 함께 세레나데가 달빛 부서지는 호수같이 잔잔한 강물을 타고 밤하늘 가에 울려갔다.

 

그는 때로는 꽃피는 공원이나 잔디밭에서 네잎 클로버를 뜯어 들고 “요츠바노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며 내 약손가락에 매어 주었다. 그러면서 뜨악 뜨악 고향인 일본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의 노래를 나름대로 번역해서 우리말로 따라 불렀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바다 빛에 짙은 노을 배어든 셔츠를 입고

양산을 빙그레 돌리며 풀밭 사이를 걸어와요

날 좋아 하지 않느냐 거기 멈춰서라 소리쳐요

인적 없는 풀밭의 미궁에서

요츠바노 클로버

손으로 흔들어 보여요 .기적이 일어 날거예요

 

 

그때 난 참말로 행복했고 우리의 행운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 어깨에 손 한번 다정히 올려 주기도 멋쩍어 하던 그와 장시간에 걸친 따분한 데이트를 어떻게 참아 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 지금도 가끔 진저리 친다.

 

모든 것이 그의 편은 아니었다.

"무하는 일등 가는 사위감이다. 미남이지 건강하지 체격이 일품이라. 거기다 머리 좋고 유머 있고……, 메너 있고. 어떤 귀한 집 규수한테 장가들겠는지 무하는 참으로 되어먹은 사람이다."

 

언젠가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지만 그러시던 어머니가 돌변하실 줄은 몰랐다. 당신의 일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하셨단다.

 

온 집안은 어느 날 갑자기 오만한 짐승이 지나간 듯 리듬이 깨지고 쑥대밭이 되었다.

 

아빠와 오빠는 물론이고 할머니까지 반대했다.

 

"친자식처럼 위해주고 수년을 아들처럼 대해주었더니 이제 와서 발꿈치를 무는구나."

"네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 너무나 실망스럽고 어두운 기운이 온 집안의 기분을 잡쳐 놓은 듯 했다.

 

그러나 어쩐지 가족들은 나에게는 관대했다. 아니 아예 철부지여서 "평양에 이사 가면 모든 것이 잊혀 지겠지" 하고 상대하고 싶지도 않은 듯했다.

 

내 마음을 흔들어놓은 그 사람, 늘 함께 한 집에서 허물없이 뒹굴며 경계 없던 그 사람은 어느 날부터인지 석 달에 한 번씩만 나에게 연락했다.

 

사람을 보내 나를 몰래 만나자고 했다.

 

기다림에 지쳐버린 나는 남자가 밖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을 때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주고 위해주는 우리 부모들을 왜 그렇게 멀리 하는지 그 사람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나만 믿어 달라고 내가 부모들을 다 설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와 부모사이에 너무나 많은 얘기가 오고 갔다는 것을 몰랐다. 이미 부모님은 딸을 줄 수 없다고 선고했고 발길을 끊어줄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우리 부모는 넘을 수 없는 장벽임을 나는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불안한 세상을 살아오셨기에 자식마저 일본에서 온 조총련 자제에게 시집보냈다가 언제 나라의 변덕에 변을 당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돈이 없고 유명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어울리지 않는 짝을 승인하지 않는 여느 부모와는 다른 경우였다. 그것은 자식의 생사의 위험을 포착한 부모의 본능적인 자식 사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시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때 우리 부모님의 반대 이유가 다른 집 부모들과 너무나 꼭 같아 보여 아연했다.

 

나도 지방에서 살아 보았지만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면 절해고도에 가서 산들 무슨 한이 있으랴.

 

나는 편견과 속세에 물들지 말라고 교육하시던 우리 부모님이 영신의 아빠와 다를 바 없이 사람을 보지 않고 먼저 출신성분과 토대와 같은 문제를 결혼의 조건에 두는 것에 실망했다.

 

하지만 오빠가 자기친구를 찬성하지 않은 이유는 조금 달랐다.

 

영신과의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오빠는 첫사랑에 실패한 무하가 어리숙하고 순진하기 만한 동생을 엉큼한 마음으로 꾀어냈다고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고 게으르고 나태한 데가 있는 무하가 여리고 착하고 순하기만 한 동생과 짝을 이루면 험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아 결정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결혼을 전제로 한 어느 사랑에 완전한 순수가 있을까. 하지만 나를 나 이상으로 잘 알고 사랑하신 분들의 걱정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에야 나는 부모님과 오빠의 우려가 얼마나 정확히 맞아떨어졌는지 혹독한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결국 나의 수난의 운명은 그들의 뜻을 거역하고 방종과 독선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 결과였다. 슬프게도 나는 그때부터 많은 세월을 지나 보내면서 잘못된 선택에 대해 깊고 뼈아프게 뉘우치게 된다.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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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7-15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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