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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44] 삶은 어디에

| 신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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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연재 44] 삶은 어디에

(이지명 작)

 

 

지방 정부의 대표로 건너온 자기들의 요구를 이만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콧대 높고 자존심 세기로 이름난 이 땅의 지도자들이다.

배창호는 울컥하는 심정을 가까스로 자제하며 허지우의 얄미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못 하겠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방금 본 영상 자료와 함께 상부에 현 실태를 그대로 보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보고되지 않았는가요?"

"물론 되었지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귀국의 입장을 빼놓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치권 안에서 발생하는 마약 범죄가 대륙의 깊은 안쪽으로 확산되는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경인 강 대안을 통해 밀반입 되는 아편을 막는 건 귀국의 엄정한 대책이 없이는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지금껏 우리는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편 밀반입은 더욱 지능적이고 교묘한 수법으로 마치 홍수처럼 그 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어떤 파격적인 경고가 없이는 그 줄을 끊을 수가 없게 됐지요. 만약 못하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그 말은 아편 밀수 자체를 못 본 척 하겠다는 말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상부에 보고하구요. 우리로선 다른 선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배창호는 흥분된 심정 그대로 단숨에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냈다. 그랬지만 아직도 못다 한 말이 가득했다. 너희들 땅에서 아편 재배를 하는 것만은 사실이잖느냐. 문제의 핵심을 바로 거기에 있다. 이번뿐이 아니다. 앞으로도 증거만 잡으면 계속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강경하게 내밀 것이다.

 

아무리 식량 사정이 어렵다 한들 그 값이 비싸다고 하여 그 따위 아편을 대량 재배하는 너희 나라는 도대체 어떤 심보를 가진 나라냐. 수량상 엄청난 아편을 자국 내에서 다 소화시키지 못하는 이상 그렇다면 그것으로 세계를 질식시키겠다는 것인가, 아편 전쟁의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로선 이것만은 절대 그냥 적당히 넘기지 못할 것인 즉 양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배창호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여기는 중국과는 달리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대로 내뱉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 말이 이치에 딱 맞는 진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곳 북조선에서의 자유란 침묵 밖에 없다는 것을 배창호도 잘 알고 있었다.


"알만합니다. 굳이 총살형을 양쪽 강 대안에서 같은 날 동시에 집행하겠다는 그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어쩐지 좀 섭섭한 생각도 드는군요. 우리는 중국 공안에서 정식 의뢰한 문제여서 외면하지는 않겠지만 범죄자를 처벌하는 방식까지 그쪽 의도를 무작정 따라야 하니, 조금 무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것까지 헤아려 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같은 하급 관리가 이러쿵저러쿵 논할 것은 못되지요. 나는 다만 상급의 지시를 받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기로 온 것뿐입니다. 집행하고 안하고는 당신들의 자유겠지요. 난 돌아가서 실태 그대로 보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미처 모르고 드린 말은 아닙니다. 저 역시 같은 입장의 사람으로서 모든 것이 무척 알고 싶었을 뿐이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양쪽 합의가 이미 결정되었으니까요. 모든 것이 차실 없이 그대로 집행될 것입니다, 돌아가셔서 기분 좋게 보고할 준비나 미리 갖춰 놓으십시오."


어김없는 비양조다. 민경진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앙다문 입에서 이빨 짓물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지우는 그냥 씨부려댄다.


"어쩐지 기분이 묘하단 말입니다. 그 쪽은 꼭 형님 노릇만 골라 하려 드니 말입니다. 대국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을 제기하면 무조건 따라주길 원하는 그것을 한 마디로 뭐라고 표현해야 정확할지, 그러나 이 자리에서 명백히 말씀드릴 것은 우리 역시 개개인들이 아편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쪽에서 의뢰가 와서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첨부할 것은 아편 범죄자들의 적극성은 우리 보다 그 쪽이 더 하다는 것입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마치 우리가 아편 밀수를 조장하는 것처럼 형님 체면만 차리려 드니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체통의 크기를 가지고 위아래를 가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배창호의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민경진은 큰 기침을 내 뱉으며 담배를 꺼내 물고는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켜댔다.

 

"우린 다만 어떤 일이 있어도 아편 밀매만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귀 측의 의향이 어떠하시든 그건 생각대로 하십시오. 물론 이 문제에 한해서 네가 더 하냐, 내가 더 하냐 하는 데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아편은 귀국의 엄연한 생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황소가 뒤를 보지 않으면 쇠똥구리가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정 반대로 허지우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죽거리던 그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지자 배창호는 웃음집이 흔들 거렸다. 자기의 적당한 비유가 아마도 허지우의 멱통을 찌른 모양이다. 한마디 더 보태는 배창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굼실거렸다.


"황소의 배설물에 대한 제거가 힘드시다면 우리가 발 벗고 도와 줄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 요청만 하신다면…"

"증거가 있습니까?'

허지우는 냉랭한 시선으로 웃음기 가득한 배창호의 너부죽한 얼굴을 직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배창호의 입이 우물거리다가 멎었다.


"이 자리는 소주병이나 기울이며 횡설수설하는 뒷골방이 아닙니다. 우리가 내 뱉는 한 마디의 말 그 자체가 국사와 연관이 있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림짐작으로 함부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대표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창호의 낯빛이 수수떡처럼 붉어졌다. 쓸데없는 입씨름은 언제나 백해무익한 것이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내 뱉은 한 마디 말이 결국 자기를 곤경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오리발을 내미는 것도 한도가 있다. 다량 아편 생산국의 정체를 이런 억지로 숨길 수 있을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공연한 입놀림 한번으로 당당한 전권 대표의 이미지를 흐리게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증거를 대라는 그 한 마디에 뭐라 대척할 수 없는 자기를 두고 배창호는 안절부절 했다.


바로 그때다. 궁지에 몰린 배창호를 구원해 주기라도 하듯 땅. 하는 총소리가 바깥에서 터졌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마주 보며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밖을 향해 후다닥 뛰쳐나갔다. 그래도 빠른 것은 민경진이다.


사다리가 걸쳐진 높은 담장 밑에 한 사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벌써 여기저기서 뛰쳐나온 안전원들이 쓰러진 사내를 에워싸고 있었다. 민경진은 쓰러진 사내가 누구라는 것을 벌써 알아보았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정찰 일꾼인 민경진은 그 순간 허지우의 네모진 얼굴을 살폈다. 뜻밖의 사태에도 무감각한 듯한 허지우의 입가에 알릴 듯 말듯 얼핏 스쳐 지나는 엷은 미소를 민경진이 놓칠 리 없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자식'


어쨌거나 이 상황에 민경진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쓰러진 사내 앞으로 곧장 다가간 그는 사진기 렌즈를 사내의 얼굴과 콸콸 피가 쏟아지는 왼쪽 가슴에 초점을 맞추며 연속 셔터를 눌러댔다. 마치 그 모습은 사건 입회를 온 정찰 일꾼이 아니라 사건 취재를 나온 기자 같았다.



호송원의 총대에 쫓겨 밖으로 나온 강기수는 눈앞이 캄캄했다. 원체 이 자리에 자기 대신 수갑를 차고 서 있어야 할 사람은 최문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최문기의 모습은 종적이 없고 자기가 잡혀 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TV 화면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본 강기수는 그때부터 심히 불안을 느꼈다. 사전에 허지우는 강 건너에서 온 사람들 앞에서 모든 것을 시인하라는 귀띰을 했다. 강기수로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돌발적으로 바뀐 상황에서 그 어떤 출로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밖으로 나온 강기수는 큰 숨을 뽑으며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이제 자기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허지우가 이 사건을 담당한 이상 자기를 막다른 골목에 밀어붙이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생긴다. 허지우 역시 이 아편 밀매에서 한 몫 든든히 챙긴 사람이다. 하물며 일을 그르쳐 최문기가 아닌 자기가 잡혔다하더라도 문제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면 자기 역시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허지우인들 왜 모를까 싶다.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 뿜으며 한 걸음 옮겨 딛는 그의 눈에 담장에 걸쳐놓은 사다리가 보였다. 강기수는 그 순간 그 사다리가 운명처럼 보였다. 그래, 저걸 딛고 키 높은 담장을 넘어서면 아무런 구속도 없는 자유의 세상이다. 수족이 묶인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순간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것이 자유였다.


강기수는 뒤에서 따라오는 호송원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호송원의 눈길이 뱀 같이 섬뜩한 느낌을 준다. 웬일인지 늦은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안전국 구내에는 사람 하나 얼씬 하지 않는다. 괴괴한 정적만이 흐르는 이 넓은 구내에 자기들 단 두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을 만큼 끝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강기수는 저도 모르게 사다리 쪽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조심스레 말을 옮겨 놓았다. 자기가 들어가야 할 구류장이 정 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송원은 강기수의 발걸음을 제지하지 않았다.


얼마 쯤 걷던 강기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응당 뒤따라 붙어 있을 줄 알았던 호송원이 멀리 뒤에 있었다. 이 순간 강기수의 머리에 번개 같은 섬광이 일어났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이 허지우의 마지막 선택이었단 말인가. 최후로 자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허지우로서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를 도망가라고 사다리까지 담장에 세워놓고 있었다면 저 담장 밖에 또 다른 구원의 손길이 대기하고 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만약 아니라면? 강기수는 다시 한 번 총대를 쥐고 서 있는 호송원을 뒤돌아보았다. 긴가 민가 하는 자기의 심중을 알고 있다는 듯 호송원은 히죽 웃으며 넌지시 고개 짓까지 한다.


아하- 강기수는 하늘에 감사했다. 아무렴 허지우가 그렇게 속수무책일 수는 없었겠지. 벌써 온몸에 새로운 기운이 와짝 휩쓸었다. 그것이 허지우가 자기 강기수를 위해 마지막으로 베푼 순간의 기쁨인 줄도 모르고, 그리고 자기가 어떤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그 희생물이 되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강기수는 높이 걸려 있는 사다리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 갔다.


역시 자기는 속절없이 죽어가는 번데기가 아니었다. 훨훨 마음껏 창공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기 위해 지금 고치의 마지막 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가기 위한 최후의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맹렬한 속도로 뛰어 사다리의 계단에 한발을 올려놓는 순간 강기수는 환희를 느꼈다. 또다시 희망이 다가온다. 푸른 하늘 가없이 넓은 창공이 가슴에 안겨든다.


다시 또 한 계단, 아, 이제 비로소 자기는 나비가 된 것이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창공의 허허 공간을 마음껏 깃을 펴고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나비가 말이다.

"탕!"

총성이 울렸다. 왼 쪽 뒤 가슴에 둔중한 그 무엇이 사정없이 들이박힌다. 순식간에 온 몸을 휩싸 안았던 그 모든 환희가 깜깜한 어둠으로 변해 버렸다.

방금 보았던 그 넓은 공간이 온통 벽으로 둘러싸인 숨 막히도록 답답한 고치 속에 불과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감지하면서 강기수는 서서히 사다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감지 못한 두 눈 시야에 아프도록 안겨든 것은 싯누렇게 변색된 한 마리의 죽은 번데기였다.


자동보총의 날선 조준판으로 자기 이마에 대고 찍고 내리 그어 상처를 낸 다음 호송원은 길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이마에는 크고 깊숙한 상처가 났다. 마치 강기수가 손목에 찬 수갑으로 내리쳐 크게 다친 것처럼. 지금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 온통 그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쓰러지면서도 도주자를 향해 끝까지 책임적인 발사를 한 호송원 앞에 허지우가 급히 달려들어 일으켜 세우며 달려온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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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11-1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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