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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유를 찾아
작성자 김형수 작성일 2016-07-23 오전 9:23:48  (조회 : 5048)

(김형수  2010년 625동란 60돌 경찰청  안보체험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민족반역자

    2008년 11월 18일

  영하 30도의 북방의 겨울 날씨에 거리는 인적이 드물더니 오늘은 행렬을 지어 연봉동 호프밭 사형장에 가고 있다.

  공장과 학교, 지어 시장마저 문을 닫고 도시의 남녀노소 모두 10시까지 집합하라고 한다.

  보통 1개월에 1~2차씩 주민들에게 공포를 주려고 사형을 하는데 오늘도 그 누군가를 총살하는 것이다.

  10시가 되자 죄수들을 태운 소형 트럭이 도착했고 5명의 ‘죄수’가 보안원(북한 경찰)들에게 끌려 땅에 내리워 졌다.

  평양의 중앙재판소 판사라는 사람이 그들의 죄행이라며 공개재판을 시작 하였다.

  남자 4명과 여자 1명인데 남자 2명(22세와 25세)은 무기 징역으로, 나머지 3명(36세의 여자와 24세, 27세의 두 남자 )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 졌다.

  무기징역은 탈북하려는 여자들의 도강을 한번 씩 도와 준 것이 죄였고 총살형은 두 번 이상을 도와주고 중국 조선족들에게서 수고비로 중국 돈 700위안 (한국 돈 13만원정도)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의 공통된 죄명은 <민족반역자>이다. 과연 그들이 어느 민족을 배반 했단 말인가.

  27발의 총성이 울리자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민주화된 땅에서 인간답게 살려던 꿈을 실현 못하고 북한이라는 공포의 大감옥에서 벗어나 보지 못한 채 온몸과 머리가 형체 없이 언 땅에 휘 뿌려 졌다.

  그릇된 사회주의 이념으로 지구상의 모든 공산권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복귀 되었고 중국과 베트남, 쿠바도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회복되지만 북한은 3대 세습정책과 일당독재, 군사공포정치로 3백만의 국민을 굶겨 죽게 하였다. 살길을 찾아 사생결단으로 탈북하거나 그것을 도와 준 그들이야 말로 자유 투사, <반김정일 용사>로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

  2008. 12. 31

  내일은 2009년 신정일이다.

  세월은 쏜 화살과 같다는 속담이 새삼스럽고 강렬하게 느껴진다.

  새천년 2000년을 맞으며 새로운 삶에 대해 꿈꾸던 1999년 그믐밤도 십년전 이라는 과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온 동네는 전기가 오지 않아 암흑세계에 잠겨있다.

  TV도 볼 수 없고 정월 명절이라고 해서 먹을거리, 땔거리가 없는 마을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어둠속에서 바깥동정을 살피고 난 뒤 출입문상태를 확인 하고 주방의 식장 뒤에 감춰둔 소형라디오를 꺼내어 건전지를 넣고 다이얼을 맞추었다.

  암흑과 기아 속에서도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다. 이어폰 선을 통하여 KBS-한민족방송 뉴스가 나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8년째 들어오는 한국의 라디오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나를 북한이라는 거대한 우물 안에서 밖을 멀리 내다 볼 수 있게 하였다.

  한국 라디오를 듣다가 들키면 민족반역자라는 죄명으로 죽을 때까지 정치범수용소에서 개죽음을 당한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신정을 맞이한다.

  한국에 가있는 탈북자들은 지금은 뭘 하는지? 신년에는 한국의 IT공업과 조선업, 자동차공업이 어떤 새 기적이 일어나는 것인지?

  한반도의 북단 압록강마을에 살지만 육체와 분리된 나의 마음은 이미 신정을 맞아 활기를 띤 불 밝은 서울의 전철역들을 누빈다.

  도로의 가로수들에 하얀 눈꽃이 내려앉은 설경의 서울거리에는 향긋한 장미꽃을 든 커플들과 손자들의 손에 이끌려 웃음을 가득 담은 어르신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나도 양손에 먹을거리를 들고 부모님에게 세배하러 가고 있다. 택시에 몸을 싣고 가는 나의 입가에는 어느새 흥얼흥얼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대학생이 된 두 손자를 보면 부모님들이 오늘 얼마나 기뻐할까? 너무도 희열에 넘친다.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려요” 아내의 소리에 깨여났다. 라디오속의 서울거리가 꿈속으로 이어지다가 남동생의 애들이 세배한다고 왔기에 달콤한 서울생활은 허공에 사라지고 만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외부 세상에서 제 자리에 돌아 온 것이다. 급하게 라디오를 감추고서야 문을 열었다.

  신년 첫날에도 정전으로 전등불도 못 보고 초불을 보아야 하는 이런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언제면 나는 우물에서 나온 개구리가 산과 들을 마음껏 뛰어 다니듯이 자유의 몸이 되어 삶의 보람을 즐길 수 있을까?

 

희망의 언덕

  2009년 1월 10일

  한국라디오를 접하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학교에서 가르친 것처럼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이고 예속경제인 한국의 애들은 학교에도 못가고 깡통을 차고 미군이 먹다 버린 쓰레기를 주어서 먹는 줄로만 생각 할 것이다.

  5년 전부터 애들도 한국에서 공부시키고 나와 아내도 마음껏 일하며 자유롭게 살려는 꿈을 실현해 보려고 애쓴 보람이 결실을 맺는가 싶다.

  중학교동창인 철웅(밀수군)이가 이달 말경에 조선족이 국경에 나오니 준비하라고 연락이 왔다. 

  추운 겨울인데 중국을 경유하자니 미리 중국 사람들이 흔히 입는 가죽점퍼도 준비해야 되고 만약을 대비하여 독약도 마련해야 한다.

  이전에도 탈북자들은 독약을 품고 국경을 넘었다.

  잡혀서 북한까지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기보다 자결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다.

  애들도 사전에 마음의 준비를 시켜야 되는데 일주일전이라도 괜찮겠지.

 

체포

  2009년 2월 27일

  조선족이 브로커비용을 토의하자는 제의로 철웅이네 집에서 핸드폰으로 중국에 전화를 하고 협상을 한 뒤 철웅이의 아내에게 중국돈을 주려는 데 3명의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한명의 손에는 30센티미터 가량의 긴 리모컨 모양의 물건이 쥐여져 있었다.

  핸드폰 전파탐색기라고 한다.

  신분확인과 검신을 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신분을 요구하자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 신분증을 꺼내 보였고 시보위부 반탐지도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핸드폰과 중국돈이 겉옷에서 나오자 그들은 속내의까지 벗으라고 강박하였다.

  팬티만 입은 상태에서 중국돈이 어디에서 생긴 것 인가고 따지였다.

  장사 하면서 모은 돈을 중국돈으로 환전해 놓았다가 밀수라도 하려고 한 것이라고 했지만 세 사람은 번갈아 가며 주먹과 발로 치고 박더니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북한에서는 개인이 다른 나라 돈을 소유할 수 없으며 회수는 물론 그 출처를 조사하도록 법적으로 규정 되어 있다.

  끌려 간곳은 보위부 반탐과 구류장이었다.

  우선 두 시간동안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몽둥이와 주먹, 발로 온 몸을 만신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왜 사유는 묻지 않고 때리기만 하냐고 하자 너 같은 반동새끼는 이 자리에서 죽여도 된다,

  여기는 보안서가 아니라 보위부다, 나라를 배반한 놈들은 짐승이나 한가지니 인권은 통하지 않는다며 더 기승을 부리며 고문하였다.

  눈에서는 불찌가 튀었고 이발이 두 대가 부러져 나갔다. 코피와 찢어진 입술과 입안에서 나온 피는 얼굴과 온 몸을 붉게 만들어 버렸다.

  만약 내가 탈북하려고 준비한 돈이라고 고백하는 날이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한국행 기도는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을 때까지 민족반역자라는 누명으로 짐승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계속 처음의 주장을 반복하였다.

  막대기를 무릎 관절에 끼우고 누르기, 의자를 들고 벽 쪽으로 돌아서서 서있기, 잠을 재우지 않고 물이 담긴 대야에 서있기 등 고문과 조사를 반복하였다.

  날이 새면 보위부 집결소에 끌려가고 집을 가택하면 라디오까지 발각 될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모든 것이 기울여 졌음을 직감했다. 다리관절은 참을 수 없이 아팠고 온몸은 움직이기 힘들었다.

  정신을 잃으면 찬 물을 끼얹어 육체는 하루 밤 사이에 시체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

  새벽 4시가 되어 왔다. 순간적으로 뇌리를 번뜩이며 떠오르는 생각이 그렇게 갈망하던 한국에 가 보지도 못하고 한순간의 자유도 누려 못보고 억울한 반역자로 처단되거나 수용소에서 짐승같이 살다가 어느 순간에 죽음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이 악마들과 도전하리라.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대로 그들에게 간신히 입을 열어 담배를 요구하였다.

  두 대를 연속 피우고 나서 사실 탈북을 시도하려고 하였는데 용서해달라고 하였다. 탈북하려고 준비한 돈도 집에 보관해 둔 것이 있는데 내 놓겠으니 이번에만 용서하면 다시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인사(뇌물)를 할 테니 믿어 달라고 하였다.

  돈 은닉장소를 물어 보기에 땅에 파묻어 찾기 힘들다면서 복잡하게 설명하자 저들끼리 무어라고 이야기 하더니 나이가 많은 자가 나를 끌고 집을 향하게 되었다.

  고문당한 몸으로 도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집에 당도하니 아내가 나의 얼굴과 찢어진 옷을 보고 그 자에게 누가 이렇게 했느냐고 하면서 항변하였다.

  순간을 놓치지 말자. 대문을 거쳐 들어가서 주방을 거쳐야 안방에 들어가는 북한의 집구조로 미루어 대문을 지키고 서있던 그자는 안방에서 옥상으로 올라 옆집마당으로 통하는 우리 집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채 아내의 푸념에 응대하며 이미 사라져 버린 나를 기다렸다.

 

도강

  2009년 2월 28일

  사위는 어두웠다. 새벽 6시는 지났겠지만 겨울철이니 아직도 날이 밝자면 2시간은 더 걸려야 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보위부와 국경경비대가 비상경계령을 내리면 중국에 넘어가지도 못하고 다시 체포된다. 죽더라도 도강하는 길밖엔 없었다.

  국경에 접근하여 한참 주위를 살핀 뒤 7미터높이의 강 땜을 내리 뛰어 얼음 위를 달려 중국 땅에 들어섰다.

  영하 30도의 맵짠 추위여서 북한 국경경비대와 중국의 변방대가 자리를 이탈한 것 같았다.

  찢어진 옷과 북한산 겨울 신을 신고 얼굴마저 피멍이 진 퉁퉁 부운 몰골로 거리를 돌아 다니면 중국 공안에 잡힐 수 있기에 산으로 올랐다.

 

탈북자

  2009년 2월 28일

  날이 밝았고 산중턱에 올라서 내려 다 보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다시 돌아 갈수 없는 고향땅이 한눈에 바라 보였다.

  온 가족이 함께 지옥의 땅 북한을 탈북 하자던 것이 혼자의 몸으로 그 어떤 약속마저 남기지 못한 채 고문에 상한 몸으로 이국의 눈 덮인 산중에 던져지고 만 것이다.

  두고 온 부모처자를 다시 만난다는 것이 기약 없는 일임을 느끼면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땀과 눈물이 피멍이 든 얼굴을 적셨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국경을 넘어서 중국에 왔다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북한 보위부의 요원들이 탈북자 색출을 위하여 국경근처의 중국에 항시적으로 와있고 변방대와 공안이 그에 공조하여 날치는 상황에서 국경을 벗어나야만 했다.

  마을과 도로는 위험하기에 산속을 가로 질러 가야만 안전할 수가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눈을 입에 넣어 녹여서는 뱉어 버리며 낮에는 해를, 밤에는 북극성을 보며 서북쪽으로 쉼 없이 걸었다.

  추운 날씨여서 밤에는 걸음을 멈추면 얼어 죽을 수 있기에 정오에만 햇볕이 내리 쪼이는 산속 나무 밑에서 1~2시간 씩 자군 했다. 바람에 쌓인 눈 웅덩이가 키를 넘는 곳에 빠졌다가 간신히 나오기도 하였고 급경사 내리막길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점점 고문의 후유증으로 온 몸은 심한 통증으로 쑤시어 났고 몽둥이에 맞아 다친 갈비뼈 때문에 기침을 뱉기도 힘들었다.

  고문으로 찢어진 옷은 나뭇가지에 걸리어 더 볼꼴 없이 되었고 신발도 바닥이 터졌다.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매를 맞아 상당수가 무주고혼이 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나도 그들이 간 길을 따라 가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힘이 진하여 쓰러지기 전에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속

  2009년 3월 4일

  날이 밝았다.

  그런데 산 아래 마을 입구에 18도구라는 한글과 중국글로 된 표구가 눈에 띄었다.

  4일 동안 산 속을 죽도록 헤매면서 당도 한곳이 돌고 돌아 북한의 작은 국경마을과 마주하고 있는 중국 마을이었다. 그것도 내가 도강한 위치에서 하루면 올수 있는 곳이 아닌가?

  맥이 빠지고 더 이상 걸음을 내 디딜 수가 없었다.

  한참 숨을 돌리고 생각해 보았다. 밤에는 도로에 나서서 걷고 낮에는 산속에 은폐하거나 도로를 끼고 산속을 걷기로 하였다.

  마을 근처의 쓰레기장에서 먹다 버린 언 귤과 빵을 주어서 먹으니 며칠 동안 먹지 못했던 몸에 힘이 생기었다.

  꽁꽁 언 버린 옷들을 골라 바꾸어 입고 중국인들이 흔히 쓰는 모자를 눌러 썼다.

  산속을 헤매면서 먹지도 못하고 사경에 처하기보다 도로를 따라 모험하기로 결심하였다.

  등잔불 밑이 더 어둡다는 속담이 위안이 되었다. 밤에도 걷다가는 먼 곳에서 차 불빛이 보이면 근처에 몸을 숨겼다가 다시 걸었다.

  이틀째 되는 날 밤 11시가 지나서 12도구에 들어 서기 전의 작은 마을을 지나서 걸어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2명의 남자가 도로 옆의 나무 뒤에서 뛰쳐나오더니 나를 막았다.

  한사람은 변방대 장교복을 입은 군인이었고 한명은 사복을 입고 있었다.

  어디서 살며 어디로 가는 중인가 등의 중국말 질문에 서툰 중국말로 대답하였다.

  북한에서 탈북하자면 중국을 경유하기 때문에 일반 회화를 자습하였지만 성조 차이가 그들의 귀를 속일 수가 없었던 것 이었다.

  나를 자기들의 소형버스에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 조사를 하였다.

  사복을 입은 사람이 조선족이고 변방대 장교는 30대의 젊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저녁에 북한의 밀수군 들과 물건을 주고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현장에 내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얼굴의 상처를 보고는 중국에서 먹을 것을 도적질하다가 잡혀서 매 맞은 게 아닌가고 묻기도 하였다.

  북송되면 죽는다고 사정을 하였고 그들의 핸드폰으로 내가 잘 아는 중국에 사는 조선족과 연계되어 중국 돈 6천원(한국 돈 백2십 만원 정도)을 주고서야 3일 만에 풀려 나올 수가 있었고 브로커들의 도움으로 심양과 대련을 경유하여 45일 만에 한국에 입국 할 수 있었다.

  입국하여 대한민국에 첫발을 밟은 순간의 심정은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자유

  2009년 7월 2일

  나의 손에는 난생처음으로 대한국민의 국민이라는 법적 증거를 인정하는 주민등록증이 쥐어져 있다.

  얼마나 꿈속에서도 소원하던 것인가.

  북한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 몸을 칭칭 감은 철쇄에 묶이어 자유와 인권이 무참히 유린 당하던 몸이 법치국가인 대한국민에서 자유로운 새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떼는 오늘 우리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담당형사님이 맨 먼저 찾아와 소개를 하였다.

  북한에서 야밤에 수시로 집을 수색하고 은밀히 감시하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뇌물을 요구하거나 폭행을 서슴치 않던 보안원들과 비교해 보았다.

  다음날부터 담당형사님은 정착에 필요한 정보들과 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고 우리들의 취업을 위하여 주변에 잘 아는 회사 사장님들에게 데리고 다니며 친 형님처럼 진정으로 사랑해 주었다.

  우리들의 의료 보장을 위하여 병원과의 새터민건강지킴이 협약식을 맺어 주시기도 하고 서울시 안이 방송국들과 경찰청 112센터, 관광지들도 참관시켜주며 자주 생활필수품들도 보내주는 관악경찰서 경찰관님들의 모습 속에서 나에게 차례진 자유의 의미를 더 절감하게 되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당당한 국민이다.

  자유롭고 행복한 새 삶을 향유하며,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에서 사는 긍지를 가지고 성실히 일하며 국법에 충실한 국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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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리뷰1건
 malibu  ( 2016-08-02 )

김형수님....대한민국 국민이 되심 축하합니다.
저는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어릴적 부산 거리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며
시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통일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인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향유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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